일본을 ‘멀고도 가까운 나라’라고 부른다. 우리나라를 식민 지배한 일본은 역사를 왜곡하고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등 갖가지 사안으로 우리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나라다. 그런가 하면 일본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즐겨 찾는 여행지이기도 하다. K팝과 K드라마에 심취한 일본 젊은이들이 한국을 많이 찾는 것도 근래의 새로운 풍경이다.1910년 한일합방 이후 많은 조선인이 일본으로 건너가거나 끌려갔다. 1945년 일본이 우리 땅에서 떠났지만, 공산 정권이 들어선 북한이나 혼란을 겪다가 전쟁이 터진 남한으로 돌아오는 일은 쉽지 않았다.<파친코>는 1910년부터 1989년까지 4대에 걸친 재일 한국인의 삶을 담은 소설이다. 두 권으로 구성된 이 소설에 재일교포들이 일본에서 겪은 고난과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민진 작가는 7세 때 미국으로 이민 가서 예일대 역사학과와 조지타운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기업 변호사로 일했다. B형간염으로 건강이 나빠지면서 변호사를 그만두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첫 장편소설 <백만장자들을 위한 공짜 음식>이 11개국 언어로 번역되고 여러 상을 받았다.세계적 화제작으로 떠오르다두 번째 장편소설 <파친코>는 대학교 3학년 때인 1989년에 구상해 쓰고 고치기를 거듭했다. 2007년 일본계 미국인 남편이 도쿄로 발령 나 일본에서 지내며 조선계 일본인 수십 명을 인터뷰한 뒤 다시 썼다. 2017년에 <파친코>가 출간되자 75개 이상의 주요 해외 매체가 ‘올해의 책’에 이름을 올리면서 세계적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2022년 애플TV에서 드라마로 만들어 또다시 화제가 되었다.4대에 걸친 삶의 여정을 담은 만큼 <파친코> 1, 2권을
페테르 글렙스키 경위는 몇 년 만에 업무에서 해방되어 휴가를 보낸다. 그가 추천받은 휴양지는 눈 덮인 산에 자리한 아늑한 호텔, ‘죽은 등산가’다. 어느 등산가가 추락사한 뒤로 유명해진 이 호텔에서는 투숙 첫날부터 기이한 사건이 일어난다.갑작스레 사라졌다가 엉뚱하게도 남의 방에서 나타난 슬리퍼. 정체를 알 수 없는 발자국과 거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울리는 전화.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책상에 놓여 있던 협박문……. 투숙객이 도둑맞았다고 호소하던 금시계는 다른 사람의 옷가방에 숨겨져 있었다. 그 옆에는 권총이 발견된다. 은으로 만든 탄환도. 누가 흡혈귀를 죽이려고 준비한 걸까?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서는 아무래도 유령 아니면 불온한 범죄의 냄새가 난다.한번 의심하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도 조금씩 수상하다. 경위와 마주치자 공포에 질려 부들부들 떨던 남자. 장난을 그만두지 못하는 이름난 마술사. 남자인지 여자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는 건방진 젊은이. 아름답고 매혹적인 부인과 위협적으로 으르렁대는 남편(심지어 그들의 방에서는 사냥용 채찍이 발견된다). 영구기관과 불가사의한 신비에 관해 떠드는 호텔 주인. 설상가상 호텔은 갑작스러운 눈사태로 인해 한동안 외부와 단절된다. 덩그러니 고립되어 클로즈드 서클로 변한 호텔에서는 물론, 누군가 시체로 발견된다. 미스터리에서는 더없이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이 소설을 쓴 스트루가츠키 형제는 소비에트/러시아의 대표적인 SF 작가다. 그들의 작품 다수가 한국에도 번역되었고, 그중 <노변의 피크닉>이나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년>처럼 유명한 작품은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
학교 앞 일번지를 언제부터 드나들었는지 모르겠다. 입학하자마자, 어쩌면 입학식도 치르기 전이었을 테다. 그전부터 이미 예비대학이니 신입생 환영회니 술 마실 일은 많았으니까. 일번지는 치킨집이지만 우리의 안주는 주로 노가리와 번데기, 쥐포 같은 것들이었다. 치킨 냄새를 맡으며 겉바속촉의 노가리를 고추장에 찍어 먹었다.일번지 주인 아저씨는 늘 무심한 얼굴로 생맥주를 담아주거나 치킨을 튀겼다. 손님에게 웃음을 지어야만 친절한 건 아니다. 술 먹다 돈이 부족하면 학생증을 대신 받아주던 곳도, 학교 행사 때 후원금을 받기 위해 늘 첫 번째로 들르는 곳도 일번지였다. 돈도 없는 것들이 자리만 차지하고 앉아서 값싼 안주만 시켜 먹었으니, 늘 붐볐지만 정작 아저씨는 돈을 많이 벌지는 못했을 것 같다. 일번지에는 늘 아는 얼굴이 앉아 있었다. 아마 늘 오는 사람들만 와서 그랬을 테다. 우리는 일번지에서 동아리 뒤풀이를 했고, 학회 뒤풀이를 했고, 공연 연습 뒤풀이를 했고, 집회 뒤풀이를 했다. 그도 아니면 어영부영 학교를 떠돌던 이들이 한 일도 없이 뒤풀이를 했다. 그러고 앉아 있으면 또 아는 얼굴이 와서 자연스레 어울려 앉았다. 먹은 대로 돈을 내지도, n분의 1을 하지도 않았다. 있는 사람이 더 내면 되었고, 없는 사람에게 생맥주 한 잔 못 사줄 이유도 없었다. 제법 술이 돌고 나면 우리는 노래를 불렀다. ‘오늘의 할 일은 내일로 미루고, 내일의 할 일은 하지 않는다. 노나 공부하나 마찬가지다…’박찬일 셰프의 <밥 먹다가, 울컥>을 읽으면서 내가 떠올린 식당은 일번지였다. 음식에 쌓인 오래된 그리움을 털어놓는 에세이인 이 책은, 막막하던 유학 시절 고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