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극적 주주친화책으로 주가 저평가 해소 나서
"투자 재원 소진하면 성장잠재력 훼손" 의견도
삼성전자를 비롯한 주요 상장기업들의 자사주 매입 ‘러시’에 증권가는 일제히 환호성을 올리고 있다. 장기 박스권에 갇힌 한국 증시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호평 일색이다. 이와 별개로 기업들이 종전과는 차원이 다른 재무전략을 가동한다는 점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투자할 곳이 마땅치 않고 실적까지 정체된 상황에서 투자자들의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해야 한다는 현실적 판단이 작용하고 있다는 관측이다. ○“주요 대표주 과도하게 저평가”
올 하반기 자사주를 사들였거나 매입 계획을 발표한 상장사는 ‘삼성·현대자동차·SK’로 요약할 수 있다. 한화생명(5200억원)과 네이버(1859억원)를 빼면 지난 6월 이후 자사주 1000억원 이상을 매입한 곳은 모두 이들 3개 그룹 계열 소속이었다.
삼성전자는 내년 1월까지 4조1000억여원 규모의 자사주를 장내 매수할 예정이다. 삼성생명과 삼성화재는 각각 7085억원, 5300억원어치를 사들이기로 했다. 삼성물산(4400억원)과 삼성증권(1180억원)도 자사주 매입 계획을 공시했다.
현대차그룹에서는 작년 11월 4500억원어치의 자사주 매입을 결정한 현대차에 이어 현대모비스가 지난 9월 2200억원어치의 자사주를 사들이기로 했다. SK와 SK하이닉스, SK텔레콤 등 SK그룹의 핵심 회사들도 각각 5000억~8000억원대의 자사주 매입을 결의했다.
이들 기업은 대부분 우리 경제의 고성장기를 이끈 대형주다. 국내 주식시장에서 투자자들로부터 외면받고 있는 저성장주라는 공통점도 있다. 현대차의 주가순자산비율(PBR=주가/주당순자산)은 0.73배, 현대모비스는 0.99배로 모두 1배 미만이다. 회사가 문을 닫고 청산해도 주주들이 손해를 보지 않을 정도로 자산이 많다는 의미다.
삼성전자와 SK텔레콤, SK하이닉스 등 다른 대형주도 PBR이 1.2배 안팎이다. 코스닥 ‘대장주’인 셀트리온(PBR 6.62배)과 헬스케어업종 대표주인 메디톡스(31.87배) 등에 비해 턱없이 낮다. 대형주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폭발적인 성장을 일궈내지 못하자 투자자들이 외면한 결과다.
이런 상황에서 자사주 매입 등과 같은 주주가치 제고책은 성장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기업들의 돌파구라는 분석이다. 이채원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 부사장은 “신흥 시장은 기업들의 성장을 통해 주주들을 만족시킬 수 있지만 선진국 증시에선 성장기업의 숫자가 많지 않아 고배당과 자사주 매입·소각 등으로 주주에게 이익을 돌려주려는 경향이 강해진다”고 말했다. 한국 경제가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길목에 서 있는 가운데 삼성전자 등 간판 기업들의 잇따른 자사주 매입은 이런 변화를 촉발하는 역할을 할 것이란 설명이다.
○“기업 중장기 성장에 악영향”
일부 전문가들은 대규모 자사주 매입이 기업의 신용등급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상장기업이 그동안 쌓아뒀던 자기자본으로 자사주를 사들이면 부채비율(부채를 자기자본으로 나눈 값)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SK텔레콤이 지난 9월 5200억원 규모의 자사주 매입에 나서자 국제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신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평가했다. 자사주 매입에 5000억원이 넘는 자금을 사용함에 따라 감가상각전영업이익(EBITDA) 대비 부채비율이 올해 말까지 1.9배까지 늘어날 것이라는 분석이다.
김상훈 신한금융투자 수석연구원은 “외국계 국제 신용평가사들은 자사주 매입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한다”며 “자사주 매입이 재무구조를 악화시킬 것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보유 현금을 자사주 매입과 소각에 쓰는 것은 기업의 향후 성장 잠재력을 갉아먹을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기업들이 투자와 성장에 대한 의지를 상실한 채 보유현금만 날리는 게 아닌지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동필 흥국증권 투자전략팀장은 “미국 마이크로소프트는 2002년 배당확대 정책을 발표했지만 성장이 멈추면서 주가가 오히려 꺾였다”며 “실적 개선 없이 그동안 쌓아둔 여유자금만으로 주주환원책을 펼치는 건 중장기적으로 기업 성장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심은지/허란 기자 summ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