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격전장에 온 듯
마지막 협곡 취탕샤 지나면
저 멀리 유비가 숨진 바이디청 보여
삼국지의 격전장 징저우에서 배에 오르다
인천에서 비행기로 약 세 시간을 날아 후베이성 우한(武漢)에서 버스로 갈아타고 다시 세 시간을 달려 징저우(荊州)에 도착했다. 징저우 부둣가에 도착한 건 늦은 밤. 창장 크루즈 ‘양쯔 골드’가 은은한 불을 밝히고 있다. 뱃머리 쪽에는 층층이 연회장, 레스토랑, 라운지 등이 자리하고, 그 뒤로 선미(船尾)를 향해 양옆으로 객실이 이어진다. 객실마다 창장을 내다볼 수 있는 발코니도 마련돼 있다. “여러분은 내일 오전 이곳 징저우를 둘러본 뒤 저녁에 서쪽의 충칭(重慶)으로 항해하게 됩니다. 양쯔 골드는 첫 출항 이래 단 한 번도 사고가 나지 않은 안전한 크루즈입니다. 숙련된 선장과 선원들이 여러분을 모실 것입니다.” 멋진 제복을 입은 선장의 환영 인사다. 비로소 여행이 시작된 것이 실감난다.
창장 문명의 발원지인 징저우는 오랜 역사에서 여러 나라가 차지하려 했던 땅이다. 특히 삼국지의 주요 배경이었던 징저우청(荊州城)은 관우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고 했으나 끝내 잃게 된 곳으로 유명하다. 버스로 이동해 징저우청에 다다르자 견고한 성벽 위로 우뚝 솟은 성이 위용을 드러낸다. 성문을 향해 뻗은 길에 오르니 1000여년 전 그 위로 말을 달렸을 장수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성안에는 유비, 관우, 장비, 제갈량, 조자룡 등의 벽화와 동상이 곳곳에 있다. 관광객들은 저마다 좋아하는 장수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촘촘한 계단을 올라 성 꼭대기의 누각에 이르니 징저우 시내 너머로 앞으로 항해하게 될 창장이 펼쳐진다. 1000여년 전 마을, 싼샤런자
기분 좋은 고동 소리와 함께 출발한 크루즈가 먼저 닿은 곳은 이창(宜昌) 부근에 있는 싼샤런자(三峽人家)다. 1000여년 전에 이곳에 살던 소수민족인 투자족(土家族)의 터전을 재현한 곳이다. 쭉 뻗은 강줄기 양쪽으로 수려한 산길이 이어지는 이곳에서 그들은 간단한 작물을 키우고 낚시를 하며 살았다.
투자족 전통의상을 입은 여자 가이드를 따라 마을로 들어섰다. 강가의 조각배 위에서 중국의 전통의상 치파오 차림을 한 아가씨가 관광객들을 반긴다. “‘야오메이(妹)!’하고 불러보세요. 미혼 여성을 부르는 호칭인데, ‘예쁜 아가씨’라는 의미랍니다.” 큰소리로 “야오메이!”하고 외치니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며 미소를 보낸다. 그 뒤쪽으로 낚싯배의 커다란 그물이 휘장처럼 드리워져 한 폭의 그림을 이룬다.
산길로 들어서니 물가에서 빨래하는 소녀들이 보인다. 그녀들의 입에선 투자족 여인들의 노동요가 흘러나온다. 애잔한 곡조와 힘찬 목소리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몸을 스친다. 놀라 돌아보니 원숭이들이다. “산 위에 야생 원숭이들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사람이 지나가면 이렇게 아래로 내려와서 간식을 받아 가곤 하죠.”
원숭이를 뒤로 하고 다리를 건너면 싼샤런자의 대미인 전통혼례식 무대가 기다린다. 당시에는 시집온 여성들이 가족을 떠나 고된 삶이 시작되는 설움에 여러 날 울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신부 역할의 배우가 남성 관객을 신랑으로 뽑아 혼례를 치르는 광경에 슬픔보다는 웃음이 번진다.
눈앞에서 마주하는 기암괴석과 기화요초
싼샤런자를 떠난 크루즈는 창장싼샤의 관문인 싼샤댐을 지난다. 연간 발전량 847억㎾, 총 시
용량 1820만㎾로 세계 최대 발전량을 기록하는 곳이다. 낮에는 직접 도보로 댐을 둘러보고, 밤에는 객실에서 크루즈가 댐을 넘어가는 진동을 몸으로 느끼며 그곳을 지났다.
댐을 넘으니 비로소 창장싼샤가 시작된다. 먼저 시링샤(西陵峽)와 우샤(巫峽)가 다가온다. 갑판에서 76㎞의 길고 긴 협곡 시링샤를 오래도록 바라보며 지나니 수려한 풍경의 우샤가 등장한다. “위쪽의 큰 봉우리가 이곳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션뉘펑(神女峰)입니다. 신녀가 바위로 변해 이곳 백성들의 안녕을 돕고 있다는 전설이 담겨 있어요.” 선장이 가리키는 봉우리는 엷은 안개를 옷자락처럼 두르고 신녀라는 이름에 걸맞은 자태를 뽐낸다.
우샤를 지나서는 작은 배로 갈아타고 창장 지류를 따라 ‘작은 싼샤’라는 뜻의 샤오싼샤(小三峽)로 들어섰다. 협곡의 절벽을 좀 더 가까이에서 마주하기 시작했다. 기암괴석은 사람 얼굴이나 동물을 닮았고, 구석구석 기화요초(琪花瑤草)도 숨어 있다. 고원에서 내려온 양이나 염소도 간혹 모습을 드러낸다.
구름을 가르는 듯 협곡을 헤치다
함께 여행하며 친숙해진 다른 나라 승객들과 함께 수영장에 발을 담그고 쉬고 있는데, 창장싼샤의 마지막 협곡인 취탕샤(瞿塘峽)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선내 방송이 나온다. 갑판으로 나가니 광활하게 펼쳐진 협곡이 시야를 압도한다. 양옆으로 짙푸른 골짜기가 끝없이 포개지고, 크루즈는 그 사이를 헤치듯 강줄기를 가른다. 거대한 산수화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다.
크루즈가 속도를 늦추자, 협곡의 풍경이 오감을 파고든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 귓전에 잦아드는 새소리, 안개에 뒤섞인 풀 냄새가 몸을 감싼다. 모두 넋을 잃고 이 경관에 몸을 맡긴다. 언제 또 이런 경치 속으로 깊숙이 들어올 수 있을까. 안타까운 마음에 카메라 셔터를 누르지만 사진으로는 도저히 표현되지 않아 그저 눈에 담을 뿐이다.
마지막 협곡을 통과하자 오른쪽으로 멀리 바이디청(白帝城)이 모습을 드러낸다. 유비가 오나라에 패해 피신한 뒤 숨을 거둔 장소다. 창장 주변 그 어디든 역사가 서리지 않은 곳이 없다. 바이디청을 지나 만나게 되는 스바오자이(石寶寨)는 명나라 때 못을 단 하나도 쓰지 않고 쌓아올린 12층 목탑이다. 오랜 세월 비바람을 견디다 못해 현재는 위쪽 세 개 층에 못을 추가했다고 한다. 크루즈에서 내려 스바오자이에 오르니 지금까지 지나온 창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풍경을 꼭 기억해두세요. 우리는 곧 마지막 정박지인 펑두(豊都)에서 여행을 마치게 됩니다.” 도교 문화가 남아 있는 펑두는 ‘사람이 죽은 뒤 영혼이 모이는 곳’이라 불린다고 가이드는 덧붙인다. 그 말을 들으니 지난 창장 크루즈 여행이 꿈을 꾼 듯 더욱 아련하게 느껴진다.
여행 정보
11월 중순~말까지 단풍철…강물 수위 따라 운항구간 다를 수도
1. 크루즈 여행은 보통 4박5일 일정으로 진행된다.
2. 노선은 충칭에서 출발해 징저우에서 마치는 것이 보통이다. 역방향으로 징저우에서 승선 뒤 충칭에서 일정을 마칠 수도 있다.
3. 강의 수량에 따라 출발 날짜나 지점이 달라지기도 한다. 충칭의 수량이 적어서 그 다음 부두인 펑두~징저우 사이만 운항할 때가 많다.
4. 일부 관광지는 별도의 요금이 추가되는 선택 사항에 속한다. 보통 하루 전에 예약을 받는다.
5. 선내 기념품점 쇼핑은 마지막 날에 하는 것이 좋다. 대부분 반값 정도로 크게 깎아준다.
6. 11월 중순에서 말까지는 단풍철인데 한국의 가을 정도로 선선하다. 12월부터 2월까지는 크루즈를 운항하지 않는다.
나보영 여행작가 alleyna200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