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정주영 탄생 100년] "자동차는 바퀴 달린 국기(國旗)"…독자개발로 '제조업 강국' 씨앗 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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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 창간 51주년 기획
멈춰선 한국호, 다시 기업가 정신이다 (3) 정주영의 자립경영
"자동차 없으면 진정한 산업화 불가능"…미국 정부 회유에도 자동차 독자개발 강행
농업 중심이던 한국 산업 구조 공업으로 바꾼 계기로 작용
1976년 한국 고유차 1호 포니 이후 세계 5위 자동차그룹으로 성장
현대중공업서 자재 국산화 추진하며 창업 원하는 직원에는 독립 지원
후발 조선업체들 인재 양성소 역할
멈춰선 한국호, 다시 기업가 정신이다 (3) 정주영의 자립경영
"자동차 없으면 진정한 산업화 불가능"…미국 정부 회유에도 자동차 독자개발 강행
농업 중심이던 한국 산업 구조 공업으로 바꾼 계기로 작용
1976년 한국 고유차 1호 포니 이후 세계 5위 자동차그룹으로 성장
현대중공업서 자재 국산화 추진하며 창업 원하는 직원에는 독립 지원
후발 조선업체들 인재 양성소 역할
지난 8일 울산시 양정동 현대자동차 공장. 축구장 670개 규모인 505만㎡ 부지에 들어선 공장에서는 10초당 한 대꼴로 자동차가 생산됐다. 신차들은 공장 바로 옆 연포만 선적부두로 옮겨졌다. 1만대를 수용할 수 있는 부두에는 북미·유럽·중동 등 목적지별로 나뉜 자동차들이 선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대차 울산공장에서는 지난해 154만대를 생산했다. 단일 자동차 공장으로 세계 최대 생산량이다. 이 중 100만대가량을 수출했다. 현대 창립자인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호 峨山·아산)은 1968년 연산 5만8000대 규모의 공장을 건설하며 자동차산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국내 등록 자동차 수가 3만3000여대였다는 점에 비춰보면 처음부터 수출을 염두에 둔 투자 결정이었다. 매년 반복되는 장마철 침수 위험에도 불구하고 아산이 태화강 하구에 공장 부지를 마련한 것은 바로 수출용 부두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망하더라도 자동차는 해야 한다”
건설업으로 성공한 아산이 자동차산업에 애착을 보인 까닭은 뭘까. 왜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포니라는 고유모델 개발을 고집했을까. 아산이 1977년 5월 리처드 스나이더 당시 주한 미국대사와의 만남에서 나눈 대화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현대는 1976년에 독자개발한 포니를 생산하고 있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스나이더 대사는 포기를 종용했다.
“정 회장님, 포드든 GM이든 선택만 하세요. 현대가 원하는 조건으로 조립생산할 수 있도록 미국 정부가 지원하겠습니다. 장차 내수시장은 물론 동남아시아와 중국에서도 일본을 제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 제안을 거절하면 현대건설이 중동 건설시장에서 고전할 수도 있습니다.”
한국은 1977년 1인당 국민소득(GNI) 1000달러를 처음으로 넘긴 가난한 나라였다. 하지만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맹방이었다. 미국은 한국을 통해 옛 소련과 중국을 견제하고 있었다.
‘그런 한국에서 재계 1, 2위를 다투던 현대가 무리하게 자동차를 혼자 힘으로 생산하다가 망하면 한국 경제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게 미국 정부의 우려였다. 스나이더 대사가 내건 파격적인 조건과 협박에 가까운 회유는 미국의 우려를 반영한 것이었다.
한참 생각에 잠겼던 아산은 스나이더 대사에게 이렇게 답했다.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자동차는 철강 기계 전자 화학 등 첨단기술의 종합입니다. 자동차산업이 없으면 진정한 산업화를 할 수 없습니다. 내 일생 벌어놓은 것을 다 투입하고 망하더라도 꼭 해야 합니다. 내가 놓은 디딤돌을 밟고 후대의 누군가가 성공하면 나는 그것을 보람으로 삼겠습니다.”
“아직 농사 짓고 있겠죠”
아산이 스나이더 대사에게 설득당해 자동차산업 자립화를 포기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현대차 울산공장에서 만난 이상진 기성보(60)의 답은 간단했다. 그는 현대차가 포니 생산에 들어간 1976년 입사해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다.
“당시 공장 주변은 온통 논밭이었습니다. 자동차 선적부두가 있는 태화강 하구에선 낚시질을 했죠. 아마 저를 포함한 울산 사람들이 아직도 농사 지으며 살고 있을 겁니다. 아산이 자신의 부(富)를 지키려고 했으면 큰 위험이 따르는 자동차 독자 생산을 추진하지 않았을 거예요.”
아산은 자동차를 ‘바퀴 달린 국기(國旗)’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좋은 자동차를 해외 곳곳에 팔면 자연스럽게 한국의 기술과 공업 수준을 세계에 알릴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유재환 전 현대중공업 사장은 “아산의 자동차 독자개발은 농업 중심이던 한국의 산업구조를 공업으로 바꾼 계기가 됐으며 오늘날 제조업 강국으로 이끈 씨앗으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초기에 외부 기술 적극 활용
1967년 현대차를 설립할 때 아산은 합작 파트너로 포드를 택했다. 값싸고 질 좋은 소형차를 생산해 포드의 세계 판매망을 통해 수출하겠다는 취지에서였다. 그러나 합작 이후 포드는 사사건건 경영에 간섭했다. 현대가 생산하는 코티나의 수출도 거부했다.
1973년 아산은 포드와 결별하고 자동차 독자개발에 착수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모든 걸 홀로 할 수는 없었다. 엔진은 일본 미쓰비시의 기술을 빌렸다. 디자인은 페라리, 마세라티 등의 디자인을 담당한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에게 의뢰했다. 자동차 공장 건설은 영국의 전문가 조지 턴블에게 맡겼다. 생산라인 건설 1년 반 만인 1976년 1월 한국 고유 자동차 1호인 포니가 나왔다. 김이석 시장경제제도연구소 소장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유연한 사고로 외부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는 아산의 경영은 원리로 보면 요즘의 ‘창조와 혁신’에 맞닿아 있다”고 분석했다.
포니 생산으로 현대는 세계 자동차회사 중 16번째로 고유모델을 개발한 회사가 됐다. 아시아에서는 두 번째였다. 포니 개발 당시 개발팀에서 일한 박병재 전 현대차 부회장은 “기술 자립의 기폭제가 포니였고 그것이 나아가 전자와 통신, 기계산업까지 국산화를 이끌었다”고 말했다. 아산이 자동차 독자개발을 천명한 지 올해로 42년이다. 현대·기아자동차는 지난해 판매량 800만대에 달하는 세계 5위 자동차그룹으로 성장했다. 조선산업 자립도 이끌어
아산은 조선업을 하면서도 ‘독자기술로 할 수 있고, 독자적으로 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자립 경영’ 철학은 한국의 조선산업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초석이 됐다.
아산은 1974년 현대조선(현 현대중공업)에 국산자재개발부를 신설했다. 자재 국산화를 추진하면서 창업을 원하는 직원들의 독립도 지원하는 부서였다. 최길선 현대중공업 회장은 “현대가 국산 자재시장을 키운 덕분에 다른 조선사들도 빨리 성장할 수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아산은 1980년대 중반 부산대 강연에서 “현대중공업에서 키운 사람들이 다른 회사에 가기도 했다. 열심히 키운 인재를 빼앗길 때는 화가 났다. 하지만 그게 선발업체가 할 역할”이라고 말했다.
울산=강현우 기자 hkang@hankyung.com / 한경·울산대 아산리더십연구원 공동기획
현대차 울산공장에서는 지난해 154만대를 생산했다. 단일 자동차 공장으로 세계 최대 생산량이다. 이 중 100만대가량을 수출했다. 현대 창립자인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호 峨山·아산)은 1968년 연산 5만8000대 규모의 공장을 건설하며 자동차산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국내 등록 자동차 수가 3만3000여대였다는 점에 비춰보면 처음부터 수출을 염두에 둔 투자 결정이었다. 매년 반복되는 장마철 침수 위험에도 불구하고 아산이 태화강 하구에 공장 부지를 마련한 것은 바로 수출용 부두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망하더라도 자동차는 해야 한다”
건설업으로 성공한 아산이 자동차산업에 애착을 보인 까닭은 뭘까. 왜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포니라는 고유모델 개발을 고집했을까. 아산이 1977년 5월 리처드 스나이더 당시 주한 미국대사와의 만남에서 나눈 대화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현대는 1976년에 독자개발한 포니를 생산하고 있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스나이더 대사는 포기를 종용했다.
“정 회장님, 포드든 GM이든 선택만 하세요. 현대가 원하는 조건으로 조립생산할 수 있도록 미국 정부가 지원하겠습니다. 장차 내수시장은 물론 동남아시아와 중국에서도 일본을 제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 제안을 거절하면 현대건설이 중동 건설시장에서 고전할 수도 있습니다.”
한국은 1977년 1인당 국민소득(GNI) 1000달러를 처음으로 넘긴 가난한 나라였다. 하지만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맹방이었다. 미국은 한국을 통해 옛 소련과 중국을 견제하고 있었다.
‘그런 한국에서 재계 1, 2위를 다투던 현대가 무리하게 자동차를 혼자 힘으로 생산하다가 망하면 한국 경제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게 미국 정부의 우려였다. 스나이더 대사가 내건 파격적인 조건과 협박에 가까운 회유는 미국의 우려를 반영한 것이었다.
한참 생각에 잠겼던 아산은 스나이더 대사에게 이렇게 답했다.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자동차는 철강 기계 전자 화학 등 첨단기술의 종합입니다. 자동차산업이 없으면 진정한 산업화를 할 수 없습니다. 내 일생 벌어놓은 것을 다 투입하고 망하더라도 꼭 해야 합니다. 내가 놓은 디딤돌을 밟고 후대의 누군가가 성공하면 나는 그것을 보람으로 삼겠습니다.”
“아직 농사 짓고 있겠죠”
아산이 스나이더 대사에게 설득당해 자동차산업 자립화를 포기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현대차 울산공장에서 만난 이상진 기성보(60)의 답은 간단했다. 그는 현대차가 포니 생산에 들어간 1976년 입사해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다.
“당시 공장 주변은 온통 논밭이었습니다. 자동차 선적부두가 있는 태화강 하구에선 낚시질을 했죠. 아마 저를 포함한 울산 사람들이 아직도 농사 지으며 살고 있을 겁니다. 아산이 자신의 부(富)를 지키려고 했으면 큰 위험이 따르는 자동차 독자 생산을 추진하지 않았을 거예요.”
아산은 자동차를 ‘바퀴 달린 국기(國旗)’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좋은 자동차를 해외 곳곳에 팔면 자연스럽게 한국의 기술과 공업 수준을 세계에 알릴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유재환 전 현대중공업 사장은 “아산의 자동차 독자개발은 농업 중심이던 한국의 산업구조를 공업으로 바꾼 계기가 됐으며 오늘날 제조업 강국으로 이끈 씨앗으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초기에 외부 기술 적극 활용
1967년 현대차를 설립할 때 아산은 합작 파트너로 포드를 택했다. 값싸고 질 좋은 소형차를 생산해 포드의 세계 판매망을 통해 수출하겠다는 취지에서였다. 그러나 합작 이후 포드는 사사건건 경영에 간섭했다. 현대가 생산하는 코티나의 수출도 거부했다.
1973년 아산은 포드와 결별하고 자동차 독자개발에 착수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모든 걸 홀로 할 수는 없었다. 엔진은 일본 미쓰비시의 기술을 빌렸다. 디자인은 페라리, 마세라티 등의 디자인을 담당한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에게 의뢰했다. 자동차 공장 건설은 영국의 전문가 조지 턴블에게 맡겼다. 생산라인 건설 1년 반 만인 1976년 1월 한국 고유 자동차 1호인 포니가 나왔다. 김이석 시장경제제도연구소 소장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유연한 사고로 외부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는 아산의 경영은 원리로 보면 요즘의 ‘창조와 혁신’에 맞닿아 있다”고 분석했다.
포니 생산으로 현대는 세계 자동차회사 중 16번째로 고유모델을 개발한 회사가 됐다. 아시아에서는 두 번째였다. 포니 개발 당시 개발팀에서 일한 박병재 전 현대차 부회장은 “기술 자립의 기폭제가 포니였고 그것이 나아가 전자와 통신, 기계산업까지 국산화를 이끌었다”고 말했다. 아산이 자동차 독자개발을 천명한 지 올해로 42년이다. 현대·기아자동차는 지난해 판매량 800만대에 달하는 세계 5위 자동차그룹으로 성장했다. 조선산업 자립도 이끌어
아산은 조선업을 하면서도 ‘독자기술로 할 수 있고, 독자적으로 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자립 경영’ 철학은 한국의 조선산업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초석이 됐다.
아산은 1974년 현대조선(현 현대중공업)에 국산자재개발부를 신설했다. 자재 국산화를 추진하면서 창업을 원하는 직원들의 독립도 지원하는 부서였다. 최길선 현대중공업 회장은 “현대가 국산 자재시장을 키운 덕분에 다른 조선사들도 빨리 성장할 수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아산은 1980년대 중반 부산대 강연에서 “현대중공업에서 키운 사람들이 다른 회사에 가기도 했다. 열심히 키운 인재를 빼앗길 때는 화가 났다. 하지만 그게 선발업체가 할 역할”이라고 말했다.
울산=강현우 기자 hkang@hankyung.com / 한경·울산대 아산리더십연구원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