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사이드 人터뷰] 줄리안 코바체프, 무대에서 두 번 쓰러진 남자…"대구에 온 건 모험이자 운명"
‘오뚝이’ 마에스트로의 기적
오케스트라 단원들 진지함에 반해
지휘봉 잡은 뒤 연주회 매진 행렬
올해 무대서 두 번 쓰러졌다 회복
퇴임 前 실황 음반 제작하는 게 꿈

음악 인생의 원천은 카라얀
음악인 부모님 따라 베를린 유학
카라얀의 마지막 콩쿠르서 우승
“끝없이 배워라” 경험의 힘 가르쳐줘


대구시립교향악단의 정기연주회가 열린 지난 5월 말 대구시민회관 콘서트홀. 브람스 교향곡 1번 연주를 성공적으로 마친 직후였다. 앙코르곡 ‘사랑의 인사’ 선율이 흐르던 중 상임지휘자 줄리안 코바체프의 무릎이 갑자기 꺾였다. 지휘대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그의 모습에 곳곳에서 비명이 터졌다. 연주는 멈췄다. 직원들이 무대로 뛰어 올라왔다. 심장 발작이었다. 현장에서 심폐소생술로 응급 처치를 받고 경북대병원으로 이송된 코바체프는 다행히 치료를 마치고 무사히 퇴원했다.

그는 6월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또 쓰러졌다. ‘아레나 디 베로나 오페라축제’에서 리허설을 하던 중이었다. 코바체프는 다시 일어나 현지에서 오페라 ‘나부코’ 7회 공연과 ‘토스카’ 2회 공연을 성공적으로 지휘했다. 두 차례나 쓰러졌는데도 그는 의식이 돌아오면 어김없이 지휘봉을 잡았다. 음악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지난해 4월 대구시향 상임지휘자로 영입된 코바체프가 시향 정기연주회의 ‘매진 행렬’을 이끌고 있다. 지금까지 그가 지휘한 정기연주회 12회 가운데 9회가 매진됐다. 대구시향은 코바체프가 온 뒤 연속 매진으로 관람석이 부족해지자 정기회원제 운영을 잠정 중단하고, 합창석까지 객석으로 개방했다.

그가 대구시향을 맡은 뒤 소리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는 평가가 많다. 두 번의 심장 이상으로 ‘투혼’ ‘열정’의 이미지까지 더해졌다. 지난달 말 대구시민회관에서 만난 코바체프는 건강 상태를 묻자 “취미인 테니스를 칠 정도로 좋아졌다”며 “의사가 문제없다고 해서 지휘에 전념하고 있다”며 미소를 지었다.

“대구는 내 운명”

불가리아 태생인 코바체프는 30여년 전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KBS교향악단 정기연주회를 수차례 이끌었고 2007년 12월 국립오페라단의 ‘라보엠’ 공연 당시 화재가 났을 때도 지휘봉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방한할 때마다 주로 서울에서 연주했기 때문에 대구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고 했다. 그는 “2년 전쯤 대구시에서 상임지휘자를 맡아 달라는 연락이 온 것은 ‘운명’ 같은 일이었다”고 말했다.

“문화를 사랑하는 도시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낯선 도시의 시립교향악단을 맡는 것은 모험이었어요. 하지만 대구시향의 연주를 들어본 뒤 망설임은 확신으로 바뀌었습니다. 음악에 대한 자세가 무척 진지하다는 느낌이 들었고 단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질이 뛰어났어요. 특별한 소리를 끌어내기에 상당히 좋은 ‘재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접 오케스트라를 이끌어 보니 단원들의 진지함이 지나쳐 다소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코바체프는 단원들이 음악을 좀 더 즐기기를 바랐다. “지난 1년 반 동안 진지한 자세는 그대로 두되 음악을 편안하게 대하라고 주문했어요. 그랬더니 소리가 점점 더 나아지고 있습니다. 경직된 느낌을 덜어내면 훨씬 아름다운 소리가 날 겁니다.”

그는 외국인 상임지휘자로서는 이례적으로 1년에 절반 이상 대구에 머무르고 있다. 시향에 대한 애착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구 사랑’이 깊어서다. 이탈리아 루카에 집이 있는 그는 지난해 말부터 호텔 생활을 청산하고 대구 침산동의 한 오피스텔에서 살고 있다.

“낯선 도시에 가면 어느 정도 적응 기간이 필요한데 놀랍게도 대구는 그렇지 않았어요. 인간미 넘치고 푸근한 게 ‘제2의 고향’ 같아요. 된장찌개 김치찌개 같은 음식도 진짜 좋아해요.”

대구시민들은 그런 그에게 스스럼없이 호감을 표한다. 동네에서 마주치면 알아보고 인사를 건넨다. 지난해 그의 임플란트 수술을 맡았던 대구의 한 치과의원은 “대구시향을 한 단계 발전시켜줘 고맙다”며 적잖은 수술비를 받지 않고 치료해 주기도 했다.

[人사이드 人터뷰] 줄리안 코바체프, 무대에서 두 번 쓰러진 남자…"대구에 온 건 모험이자 운명"
카라얀과의 인연

바이올리니스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코바체프는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 활을 잡았다. 첫 번째 콘서트를 연 것은 다섯 살 때 불가리아 소피아에서였다. “군인을 위한 음악회였어요. 작고 귀여운 바이올린으로 연주했죠. 부모님 덕에 음악이 늘 자연스럽게 느껴졌어요.”

아버지가 독일에 있는 오케스트라에 들어가면서 열한 살 무렵 불가리아에서 독일로 이주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접경 지역에서 살았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으로 통학하며 바이올리니스트 겸 음악교수인 프란츠 사모힐에게 배웠다. 열여덟 살 때 카라얀재단 장학금을 받아 베를린으로 유학을 떠났다. 지휘 거장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1989)과 만나게 된 계기다.

카라얀과의 만남은 그의 음악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건 중 하나다. 코바체프가 제자로 들어갔을 때 카라얀은 40대 중반이었다. 음악성이 무르익은 스승으로부터 코바체프는 ‘완벽주의’를 배웠다고 했다. “카라얀은 잘 알려졌다시피 워낙 정확한 분이에요. 한 치의 실수조차 용납하지 않는 완벽주의자죠. 목표를 정하면 어떤 장애물이 있어도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성격을 옆에서 지켜봤어요.”

스승이 기계 같은 정확함만 가르친 건 아니었다. “‘음악을 흠뻑 느껴야 한다’는 말을 수시로 했어요. 작곡가의 의도를 존중하면서 풍부하게 표현하라는 얘기죠.” 코바체프는 카라얀이 1984년 생전 마지막으로 연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그는 대구시향으로 오기 전 유럽과 미국의 숱한 오케스트라를 거치며 지휘 경험을 쌓았다.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심포니, 불가리아 소피아 필하모닉, 이탈리아 베르디 트리스테 극장 등에서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로 활동했다.

“모든 것이 내게는 배움”

코바체프는 자타공인 ‘낙천주의자’다. “지금까지의 삶에서 어려웠던 일은 거의 없었다”고 했다. “돌이켜 보면 어려운 일이 왜 없었겠어요.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베를린에서 공부하고, 계속 떠돌아다녔으니 어찌 보면 고생을 했겠죠. 하지만 항상 운명에 대해 감사하고, 좋은 경험을 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 또한 카라얀의 영향이다. 카라얀은 “생활 속에서 배움을 찾으라”고 가르쳤다. “누군가 죽거나, 계획했던 일이 이뤄지지 않는 등 나쁜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과 운명을 믿고, 어떤 일에서든 배우려는 노력이 중요해요. 카라얀은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모든 것에서 끝없이 배운 사람이었어요.”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 푸치니도 그에겐 특별하다.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를 정말 아낍니다. 푸치니의 음악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어요. 쇼스타코비치의 음악과 인생 궤적도 제게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내년 3월이면 임기가 끝나지만 그는 대구시향에 더 머물 생각이다. 실황 녹음 앨범을 제작하고 싶은 욕심도 있다.

“지휘는 개별 악기의 가락과 리듬을 산술적으로 합치는 작업이 아니에요. 악기들의 밸런스를 맞춰 음악을 창조하는 일입니다. 마법에 가까운 일이죠. 저는 모든 연주자가 지휘자의 태도를 가질 수 있다고 봐요. 대구시향 단원들 각각이 지휘자처럼 연주하는 날을 기대합니다.”

■ 대구시립교향악단은

클래식 전용관 갖춰 코바체프 날개 달고 글로벌 오케스트라로 비상

줄리안 코바체프는 대구시립교향악단에 ‘히딩크’ 같은 존재다. 대구시향은 코바체프를 제10대 상임지휘자로 영입한 것을 계기로 세계적으로 도약하는 오케스트라를 꿈꾸고 있다.

코바체프는 지난해 4월 취임 당시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오페라단을 지휘하며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아시아를 넘어 세계 최고 수준의 연주단체로 발돋움할 수 있게끔 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코바체프는 특정 작곡가나 시대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레퍼토리를 선보이고 있다. 베토벤, 브람스, 말러, 브루크너, 프로코피에프, 스트라빈스키, 쇤베르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 폭넓은 레퍼토리로 시향 단원의 역량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다.

코바체프 직전에 대구시향을 맡아 5년6개월간 이끈 곽승 KBS 교향악단 수석객원지휘자도 시향의 수준을 끌어올린 마에스트로로 큰 인기를 누렸다. 대구시향은 제9대와 제10대 상임지휘자의 역량에 힘입어 창단 이후 최고 전성기를 맞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구시향은 국내에선 드물게 클래식 전문 콘서트홀을 갖춘 교향악단이다. 2013년 11월 개관한 대구시민회관 그랜드 콘서트홀은 잔향 시간이 2초대로 국내 최고의 클래식 전용홀로 평가받는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과 비슷하다. 정명훈 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도 부러워했을 정도다. 서울시향은 전용 콘서트홀이 없어 서울시에 꾸준히 건립을 요청하고 있다.

대구는 전통적으로 문화예술 공연 인프라가 잘 갖춰진 도시다. 대구오페라하우스가 오는 8일부터 다음달 7일까지 여는 대구 국제오페라축제는 올해로 13회째다. 매년 여름에는 대구 국제뮤지컬페스티벌도 열린다.

대구=김보영/오경묵 기자 w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