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기념관 김도형 책임연구위원 밝혀

"베이징으로 가는 사절단의 모든 구성원과 상인, 하인 등 사절단과 동행하는 사람들은 세관장으로부터 오랫동안 구체적인 심문을 받았으며, 신체와 휴대품, 호패(여권) 등을 세밀하게 검사받았다."

구한말 러시아 외무성에서 근무한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포지오(1850∼1889)의 저서 '러시아 외교관이 본 근대 한국'(동북아역사재단 출간)의 한 대목이다.

포지오는 당시 여권이 길이 3인치, 너비 1인치의 목재나 골재로 만들어졌으며 여행자의 이름, 출생지, 직업은 물론 여행의 목적까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여권은 언제 생겼고 어떤 변천사를 겪었을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김도형 책임연구위원은 최근 발표한 글 '한국 근대 여행권(여권) 제도의 성립과 그 추이'에서 여권의 역사를 추적했다.

29일 김 위원에 따르면 오늘날 여권과 비슷한 문서가 '선조실록'에 등장한다.

1600년 1월 15일 기록을 보면 임진왜란 때 참전한 명나라 무관 누세진이 중국으로 돌아가려고 하면서 "지극한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바라면서 인신·집조(執照)를 구해 본국에 돌아가게 되기를 비는 일입니다"고 말한다.

당시의 집조는 안전한 귀국을 보장해주는 허가증에 더 가까웠지만, 이 단어는 계속 이어져 조선 말 들어서는 지금의 여권에 보다 가까운 의미로 쓰이게 된다.

1882년 10월 17일 청나라와 체결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제4조에는 '양국 상인이 내지로 들어가 토산물을 사려고 할 때는 피차의 상무위원에게 품청해 지방관과 연서해 집조를 발급하되…'라는 문구가 나온다.

여권이 본격적으로 성립된 것은 갑오개혁(1894∼1896) 이후다.

1985년 3월 25일 외무업무를 집행하는 '외부관제'가 반포되면서 관련 규정도 생겼는데 이때 외부의 통상국 제2과에서 여권 업무를 맡았다.

그러나 일반인 사이에서는 여권이 보편화하지 않았는지 '황성신문' 1901년 12월 23일자를 보면 "부산항에 들어오는 일본인들 80여명 가운데 대개는 여행권 없이 입국했다"는 기사가 있다.

일제강점기 들어서면서 여권 발급 업무는 일본 외무성이 가져갔고, 이는 식민통치 수단으로 쓰이게 된다.

당시 '외국여권규칙'을 보면 ▲ 계엄명령 중인 자 ▲ 중국에서 재류금지령에 있는 자는 여권을 발급하지 못하도록 했다.

김 위원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조하지 않거나 반대할 사람에게는 일절 여권을 발급하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3·1 운동 이후에는 여권 제도를 더욱 강화해 '여행권령을 발해 한인이 국경을 넘어 왕래하는 것을 엄히 막고 증명서 없이 도강하는 자는 사살하라'는 진압령을 내기리도 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외국으로 가는 독립투사 등을 위해 '여행증서'를 발급했다.

독립기념관에는 미국으로 유학 가는 김정극을 위해 1920년 4월 22일 임시정부가 발행한 여행증서가 소장돼 있다.

김 팀장은 "여권 제도의 성립은 500년간 폐쇄된 사회에 살던 한국인이 개방된 세계로 나가는 과정이었다"고 설명했다.

다만 "여권이라는 용어가 쓰인 것은 을사늑약 이후 일제가 '한국인외국여권규칙'을 고시하면서부터"라면서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는 의미에서 그전까지 일반적으로 쓰인 여행권을 다시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덧붙였다.

(서울연합뉴스) 고은지 기자 eu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