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음악은 그녀 삶의 뿌리"…피아니스트 김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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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김재미는 생명력 넘치는 연주로 사랑받는 연주자다. 성악을 하는 아버지와 음악을 사랑하는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자연스럽게 음악의 길로 들어선 후, 음악 한 길만 바라보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 길이 쉬웠던 것만은 아니다. 그녀는 수시로 삶의 고난에 놓였고, 그 방해를 이겨내며 꿋꿋이 자신의 길을 스스로 만들어왔다. 지금은 건국대 교수로 활동하며, 들끓는 생명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피아니스트 김재미와 함께 그녀의 음악 인생에 대해 들어봤다.
“어머니, 내 음악의 근원”
김재미가 음악을 시작하게 된 것은 물고기가 물에 살 듯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다. 그녀는 성악가인 아버지와 음악을 좋아하며 피아노를 즐기셨던 어머니를 통해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했다. 어머니는 전문적으로 음악을 하시진 않았지만, 그 누구보다 듣는 귀가 좋았고 음악을 사랑한 최초의 ‘음악적 스승‘이었다고 회상했다. 김재미는 다섯 살 즈음 어머니로부터 피아노 음악의 기초를 배웠고, ‘어머니’라는 존재는 그녀에게 음악의 뿌리가 되어 작고한지 28년이 되는 오늘날까지도 연주가와 교육자, 음악인으로서의 진정한 의미와 방향을 깨닫게 해준 음악의 근원이 되었다. 덕분에 김재미는 ‘음악에 대한 친밀감과 절대적인 사랑’이라는 음악인으로서의 자질을 튼실하게 키우며 이 자리까지 오게 됐다.
김재미에게 피아노를 처음 쳤을 때의 기억이 나냐고 묻자 “어머니에게 꿀밤을 맞았던 기억만 난다”며 회상했다. 그녀는 피아노에 대한 특별한 의미를 못 느끼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유년시절의 음악에 젖어들었다. 하지만 혼자 듣고 생각하며 표현하는 고독한 연습과정과 나이를 먹으며 쌓아온 인생 경험이 그녀의 음악적 열정과 함께 어우러져 자신의 내적 성장과 상당히 고독한 느낌을 주었던 피아노 솔로를 즐기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부모뿐 아니라 형제들도 모두 음악인이다. 바로 아래 동생은 ‘바이올리니스트’이며, 그보다 막내 동생 또한 언니들의 음악을 어깨너머로 들으며 독학으로 피아노를 시작해 함께 이 길을 걸었다. 가족이 모두 음악을 하다 보니 음악에 대한 추억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김재미는 1세대 성악가인 아버지의 노래에 맞춰 반주한 경험도 있고, 바이올리니스트인 동생과 함께 무대에 오른 경험도 있다. 그녀는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를 추억하는 음악회를 동생들과 함께 열기도 했었다. 지금도 각자의 일과 역할로 바쁘지만, 음악을 통한 만남은 또 다른 형제애를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운명처럼 만난 음악계의 대부와 돌아가신 어머니
학창시절 그녀는 조용히 제 할 일을 하는 성실한 학생이었다. 김재미는 “덕분에 선생님들의 사랑도 많이 받았고, 훌륭한 은사님들을 만나게 된 축복된 학생”이었다며 자신의 학창시절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초등학교 4학년때. 어머니처럼 따뜻한 교육자이신 조삼진 선생님을 만났다. 서울예고 2학년부터는 피아노계 대부라 불리는 정진우 선생님께 피아노를 배웠다. 음악을 배우는 데에 아버님 같은 분이시다. 지금의 저를 있게 해주셨다.”
김재미는 정진우 선생에 대해 늘 전체적으로 크게 멀리 보고 통찰력 있는 간결한 조언을 해주는 스타일이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혼자서 은사님의 말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게 됐고, 그 덕에 혼자 생각하고 자립할 수 있는 연주자의 능력이 많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대학교 졸업반, 오랜 기간 투병 중이셨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되는 혹독한 현실과 부딪혀야했다.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종교까지 거부할 정도로 심한 충격과 함께 슬럼프가 찾아왔다. 그런 그녀에게 정진우 교수는 한 마디를 던졌다.
“그래도 (유학) 다녀와야지.”
유학은 은사의 말씀을 따라 어렵게 결정한 일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현실적 어려움과 걱정에도 불구하고 유학을 허락했다. 그녀는 “당시의 선택은 힘들었고 두려웠지만 아마 그때 떠나지 않았더라면 이후에도 계속 떠날 수 없었을 것”이라며 과거를 떠올렸다.
험난하고 고됐던, 유학생활
그녀의 미국 유학길은 고난의 시작이었다. “비행기도 그때 처음 타봤다”며 웃은 그녀는 낯선 그곳에서 “다행히 좋은 선생님을 만나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고 당시를 추억했다. 그녀는 첫 수업 당시 선생님께서 들려주셨던 피아노 소리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프랑스 교수님이셨는데, 음악을 철학적으로 접근하며 생각하게 하는 레슨을 해주셨다. 살짝 건반을 터치해 주셨는데, 그때 느꼈던 따뜻한 소리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분한테 들었던 소리가 열린 소리에 눈뜨게 하고 소리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를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김재미는 생소하고 말도 잘 통하지 않는 그곳에서 하나의 목표만을 생각했다.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학위를 마치는 것이었다. 그녀가 다닌 인디애나 대학교는 전공 실기뿐 아니라 음악 이론으로도 엄격한 수준을 요구했던 학교였다. 때문에 2년 안에 학위를 마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어려운 시기에 용단을 내린 유학의 길인만큼 이를 악물고 후회 없이 공부해 음악적 성장을 꾀하기로 작정했고, 석사학위도 2년 안에 마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녀는 입학한 첫 학기, 얼마 되지 않아 겁 없는 도전에 나섰다. 인디애나 대학에서의 협연 오디션에 도전하기로 한 것이다. 연습에 매달리던 그녀를 본 지도 교수가 결과에 연연하지 말라고 조언했던 결전의 날이기도 했다. 김재미는 또 한 번 기가 막힌 우연과 마주쳤다. 오디션 당일이 정확히 어머니의 기일 1주년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오디션 당일이 어머니 기일 1주년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하늘에 계신 어머니께 좋은 결과를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런데 아침에 물을 마시려는데 컵을 놓쳐 그만 유리컵이 깨져버렸다”고 에피소드를 밝히며 “안 그래도 예민한 신경과 긴장감이 돌던 때에 마음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당시 오디션에는 이미 내로라하는 연주자들이 많았고, 당연히 그 사람들 중 하나가 되겠지하며 그저 음악에만 집중하고자 노력하면서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기적처럼 내가 되었다. 당시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한국 사람이 선정된 것은 처음이라며 어머니 기일에 이뤄낸 이 감동적인 날을 주변의 선배들도 함께 울면서 기뻐해줬던 기억이 난다. 정말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고 말했다.
그녀가 학위를 마치는 데 걸린 시간은 예정보다 2개월 빠른 불과 1년 10개월이었다. 그 뒤에는 보스턴으로 박사 과정을 떠나려 했지만, 우선은 한국으로 돌아오라는 아버지 애원에 따라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정신없는 생활이 이어졌다. 연주 일정과 강의 일정이 쏟아졌고, 바쁜 와중에 남편을 만났다. 결혼 생활을 하던 때라 5~10년이 걸리는 박사 과정을 하기 위해 한국을 떠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7년 정도 시간이 휙 가 버렸다. 그동안 가족도 생겼고, 아기도 있고, 연주와 강의 등 바쁜 일정 속에 살았다. 무언가 알맹이가 빠져버린 듯 허전함이 있어, 음악에만 집중해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현실을 다 버리고 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 늘 목말라하며 고민만 거듭했다. 그러다 나이 서른셋 되던 어느 날 평생 남을지도 모를 아쉬움에 홀연히 다 버리고 다시 유학길에 올랐다.”
오로지 음악과 자신을 위해 떠난 그곳에서 김재미는 즐겁게 공부했다. 아이와 가족이 늘 그리웠지만, 고팠던 자신의 음악 공부한다는 것이 진심으로 행복했다. 그녀는 “음악에 대해 더 알아가며 생각하고 연습하는 게 정말 좋았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이산가족이 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이번에도 그녀는 최대한 빨리 마무리를 짓고 돌아와야만 했다. 김재미는 집중해서 가능한 단시간에 학위를 끝낼 수 있도록 모든 수업과정은 물론이고, 교수님과 상의하면서 논문도 미리 준비하는 등 최선을 다했다. 덕분에 보통 4~5년 이상 걸리는 박사 과정을 전무후무하게 기적처럼 거의 3년, 2년 10개월 만에 마치게 됐다.
하지만 2년 10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모든 것을 쏟아 부은 탓이었는지 귀국 후 서울 생활에 적응이 잘 되질 않았다. 허무함이 그녀를 짓눌렀다. 김재미는 당시에 대해 “하나에만 너무 몰입해 다 소진하고 나서인지 모든 것에 의욕을 잃고 지쳐서 혼자 울었던 기억도 있다. 한국에 돌아왔더니 그 동안 에너지가 고갈된 나를 챙겨줄 사람은 아무도 없고 내가 챙겨야 할 사람들만 많아 힘들었다”고 말했다. 남편도, 아기도, 시댁도, 아버지도 다 잘 챙겨야 하는 입장이었던 그녀에게, 더 이상의 기력과 의욕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우울을 더욱 깊게 만들었던 것은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신 탓도 컸다.
당시에 대해 그녀는 “발버둥 칠수록 늪에 빠지는 느낌”이라고 대답했다. 김재미는 우울함과 무기력증을 어렵게 버티면서 “이렇게 무너지면 안 된다”며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되새겼다. 그렇게 1년 이상 힘든 시간을 보냈다. 결국엔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려운 순간들을 극복해 냈다.
“삶,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하며 균형감을 지키고자”
김재미는 이제껏 후회 없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왔다. 무엇이든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마음으로 몰두하며 지낸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철학에 대해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하자”라며 입을 열었다.
“최선이란, 나 자신에게 당당할 수 있도록 매 순간마다 최고의 ‘선’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가장 중요한 건 열정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과 열정을 평생 잃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절실히 느끼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삶의 균형감이다. 인생을 합창에 비유하자면 이렇다. 합창은 다양한 성부가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 어떤 순간에는 어느 한 성부가 집중되고 다른 성부들이 뒤에서 받쳐주기도 한다. 또 어느 때는 다른 파트에 집중되기도 하며 때로는 동시에 어우러지기도 한다. 삶도 마찬가지다. 모든 부분이 다 함께 가지만 어떤 순간에는 어떻게 선택하고 집중해서 조화를 이루도록 할 것인지 책임져야 한다. 삶의 조화를 만드는 ‘지휘’와 같다. 인생에서 그러한 밸런스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음악은 삶의 노래, 고통까지 품을 수 있어야
음악 철학에 대해서 묻자 그녀는 “음악 안에 삶이 있다. 작곡가의 음악에 그들의 삶과 철학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듯이 연주자도 마찬가지다. 연주자의 가치관과 삶이 묻어나는 소리를 표현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물론 아름다운 소리를 찾게 된다. 그러나 단지 예쁘고 고운 소리뿐 아니라 ‘우리의 삶에 있는 고통까지 다 품어 아름다운 소리로 승화시킬 수 있는 음악’, ‘살아있는 열린 소리, 생명력이 느껴지는 가슴 뭉클한 음악’을 하고 싶다”고 전했다.
피아니스트인 김재미가 느끼는 ‘피아노’라는 악기의 매력은 무엇일까. 그녀는 “사실 피아노 건반을 만질 때 온 마음과 정신을 담아 집중해서 울리면 ‘영혼의 울림’을 느낄 수 있다. 차가운 건반악기에서 생명의 온기를 느끼는 따뜻한 소리가 날 때, ‘살아있는 생명의 소리’를 낼 때, 엄청난 감동이 밀려온다”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래서인지 김재미는 평소 ‘소리가 따뜻하고 울림이 있다’는 평가를 많이 듣는다. 그녀는 “혼이 담긴, 생명력이 느껴지는 살아 있는 음악이 좋다. 더 잘 치고 못 치고를 떠나서 타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며 말을 이었다. “클래식의 감동이 그것이다. 시공을 초월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다 담겨 있다. 그냥 눈물이 나거나, 뭉클해지거나, 따뜻해 질 수 있는 것들 말이다. 기악에는 가사가 없다. 그래서 소리 자체가 수많은 것을 내포한다.”
인간의 고통까지 품은 아름다운 연주를 꿈꾸는 김재미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은 무엇일까. 그녀는 “한곡만 꼽기는 어렵다”며 생각에 잠겼다. 잠깐의 정적 속에 그녀가 꺼내놓은 이름은 ‘리스트와 슈만’이었다. 그녀는 “개인적으로 작곡가 리스트의 ‘고독속의 신의 축복’이란 곡을 좋아한다. 많이 알려진 곡은 아니다. 듣기에는 화려하거나 요란하지 않고 리스트의 전형적인 곡 스타일도 아니다.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감동이 좋다. 리스트의 음악은 기교적으로 어려운 곡들이 많다. 이곡은 듣기에는 편안하지만 피아니스트에게는 마치 물 아래에서 열심히 발버둥치며 물위로 고요해 보이는 백조같이 느껴지는 곡이다.”고 말했다. 이어 “또 좋아하는 곡 중에 하나가 바로 슈만의 ‘판타지’다. 피아노 문헌에서 가장 큰 대곡 중 하나로 슈만이 클라라라는 부인과 결혼하기 전 겪었던 고난과 러브스토리를 품은 곡으로 그의 감정이 문학적으로 곡에 녹아 있다. 특히, 단순한 패턴처럼 보이는 마지막 악장에는 수많은 감정의 파노라마가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좋은 음악을 나누는 것이 목표
피아니스트 김재미가 꿈꾸는 음악가로서의 목표는 분명하다. ‘좋은 음악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것은 연주를 통해서이기도 하고, 교육을 통해서이기도 하다. 그녀는 현재 건국대학교 사범대학 음악교육과 교수로 활동 중이다. 김재미는 “음악을 통해 청중들과 나누고 제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 제자들 중에서도 다른 사람에게 음악을 가르칠 사람들이 많다. 오래전부터 음악 교육에 대한 갈망이 있었고, 앞으로도 사명감을 갖고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제자들에 대해서도 애틋한 마음을 더했다.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임용이 되기 위해, 교수가 되기 위해, 어떤 성공을 위해 음악을 하는 학생들이 있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음악을 공부하면 그 길고 험난한 길을 걸어가는 동안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경우 지치고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말해준다. 대신 제대로 음악을 공부하고, 이해하며 음악을 사랑하게 되면 그 시간들이 쌓이면서 분명히 자신이 원하는 연주자도 될 수 있고, 꿈도 이룰 수 있으리라 조언해 준다.”
피아노는 나의 인생의 동반자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피아노’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물었다. 그녀는 “인생에서 스스로의 자아를 표현했던 것은 피아노를 통해서였다. 앞으로도 다른 사람과 소통하며 봉사할 수 있는 것도 ‘피아노 음악’이다. 이런 의미에서 함께하는 ‘동반자’가 아닐까 싶다. 내게는 음악, 피아노에 대한 절대적인 삶의 뿌리가 있다”고 말했다.
김재미는 국내외 다양한 독주와 협연, 교육 및 심사활동 등을 통해 앞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 나갈 예정이다. 그녀는 “여러 가지 일이 많다 보니 연습하는 시간을 갖는 게 어렵다. 앞으로도 균형을 잘 맞춰서 해나가려고 한다”며 “고인 물은 썩는다는 말이 있다. 꾸준히 하되, 어제와 오늘이 조금 다를 수 있게 늘 새로운 생각을 하려고 한다”고 단단한 계획을 전했다.
피아니스트 김재미(Kim,Jaemi)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예원 서울예고, 서울음대를 실기수석 및 우등졸업하고 미국 인디애나 대학 석사, 매릴랜드 대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고 오정주교수 추모장학생으로 선발되었고 모교를 빛낸 공로상(서울예고)수상과 동아콩쿨1위를 비롯하여 국내 다수 콩쿨을 석권했고 미국 Indiana 대학콩쿨1위, Homer Ulrich Competition 1위, Maryland 대학콩쿨 1위, TCU/Van Cliburn Concerto Competition1위, 이태리 IBLA국제콩쿨(Liszt 특별상)등에서 우승하며 그 재능을 인정받아 왔다. .
조선일보 신인음악회에 데뷰하였고 교향악 축제를 비롯, 서울시향, 대구시향, 수원시향, Indiana. Univ.. Orchestra, Maryland Univ. Orchestra, Texas Fort Worth Orchestra, 폴란드 Krakow Orchestra, 러시아 Rimsky-Korsakov Orchestra, 체코 Karlsbad Symphony Orchestra와 협연한 바 있으며 일본 시즈오까Odessey Hall, 미국 Texas Ed Landreth Auditorium과 러시아 쌍트페테르부르그 백야축제, 키시코 국제 음악제에 한국대표 피아니스트로 초청되었고 일본 Tokyo Suntory Hall, Japan Times Hall, 중국 Beijing Hall에서 연주하며 국내외 수차례 초청연주를 가졌다. 또한 Norman DelloJoio 피아노 독주곡집을 녹음(ELAN82420)하여 미국, 스위스, 영국등에서 출시되어 호평받은 바 있다.
현재 건국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피아노4季’등 다양한 테마의 기획 독주회를 중심으로 의욕적인 연주활동을 펼치면서 한국예술평론가협회 심사위원 특별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하였고 뉴욕,동경등 해외에서도 매년 독주회를 통해 활발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와우스타 정지혜기자 wowstar3@wowtv.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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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내 음악의 근원”
김재미가 음악을 시작하게 된 것은 물고기가 물에 살 듯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다. 그녀는 성악가인 아버지와 음악을 좋아하며 피아노를 즐기셨던 어머니를 통해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했다. 어머니는 전문적으로 음악을 하시진 않았지만, 그 누구보다 듣는 귀가 좋았고 음악을 사랑한 최초의 ‘음악적 스승‘이었다고 회상했다. 김재미는 다섯 살 즈음 어머니로부터 피아노 음악의 기초를 배웠고, ‘어머니’라는 존재는 그녀에게 음악의 뿌리가 되어 작고한지 28년이 되는 오늘날까지도 연주가와 교육자, 음악인으로서의 진정한 의미와 방향을 깨닫게 해준 음악의 근원이 되었다. 덕분에 김재미는 ‘음악에 대한 친밀감과 절대적인 사랑’이라는 음악인으로서의 자질을 튼실하게 키우며 이 자리까지 오게 됐다.
김재미에게 피아노를 처음 쳤을 때의 기억이 나냐고 묻자 “어머니에게 꿀밤을 맞았던 기억만 난다”며 회상했다. 그녀는 피아노에 대한 특별한 의미를 못 느끼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유년시절의 음악에 젖어들었다. 하지만 혼자 듣고 생각하며 표현하는 고독한 연습과정과 나이를 먹으며 쌓아온 인생 경험이 그녀의 음악적 열정과 함께 어우러져 자신의 내적 성장과 상당히 고독한 느낌을 주었던 피아노 솔로를 즐기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부모뿐 아니라 형제들도 모두 음악인이다. 바로 아래 동생은 ‘바이올리니스트’이며, 그보다 막내 동생 또한 언니들의 음악을 어깨너머로 들으며 독학으로 피아노를 시작해 함께 이 길을 걸었다. 가족이 모두 음악을 하다 보니 음악에 대한 추억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김재미는 1세대 성악가인 아버지의 노래에 맞춰 반주한 경험도 있고, 바이올리니스트인 동생과 함께 무대에 오른 경험도 있다. 그녀는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를 추억하는 음악회를 동생들과 함께 열기도 했었다. 지금도 각자의 일과 역할로 바쁘지만, 음악을 통한 만남은 또 다른 형제애를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운명처럼 만난 음악계의 대부와 돌아가신 어머니
학창시절 그녀는 조용히 제 할 일을 하는 성실한 학생이었다. 김재미는 “덕분에 선생님들의 사랑도 많이 받았고, 훌륭한 은사님들을 만나게 된 축복된 학생”이었다며 자신의 학창시절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초등학교 4학년때. 어머니처럼 따뜻한 교육자이신 조삼진 선생님을 만났다. 서울예고 2학년부터는 피아노계 대부라 불리는 정진우 선생님께 피아노를 배웠다. 음악을 배우는 데에 아버님 같은 분이시다. 지금의 저를 있게 해주셨다.”
김재미는 정진우 선생에 대해 늘 전체적으로 크게 멀리 보고 통찰력 있는 간결한 조언을 해주는 스타일이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혼자서 은사님의 말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게 됐고, 그 덕에 혼자 생각하고 자립할 수 있는 연주자의 능력이 많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대학교 졸업반, 오랜 기간 투병 중이셨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되는 혹독한 현실과 부딪혀야했다.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종교까지 거부할 정도로 심한 충격과 함께 슬럼프가 찾아왔다. 그런 그녀에게 정진우 교수는 한 마디를 던졌다.
“그래도 (유학) 다녀와야지.”
유학은 은사의 말씀을 따라 어렵게 결정한 일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현실적 어려움과 걱정에도 불구하고 유학을 허락했다. 그녀는 “당시의 선택은 힘들었고 두려웠지만 아마 그때 떠나지 않았더라면 이후에도 계속 떠날 수 없었을 것”이라며 과거를 떠올렸다.
험난하고 고됐던, 유학생활
그녀의 미국 유학길은 고난의 시작이었다. “비행기도 그때 처음 타봤다”며 웃은 그녀는 낯선 그곳에서 “다행히 좋은 선생님을 만나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고 당시를 추억했다. 그녀는 첫 수업 당시 선생님께서 들려주셨던 피아노 소리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프랑스 교수님이셨는데, 음악을 철학적으로 접근하며 생각하게 하는 레슨을 해주셨다. 살짝 건반을 터치해 주셨는데, 그때 느꼈던 따뜻한 소리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분한테 들었던 소리가 열린 소리에 눈뜨게 하고 소리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를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김재미는 생소하고 말도 잘 통하지 않는 그곳에서 하나의 목표만을 생각했다.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학위를 마치는 것이었다. 그녀가 다닌 인디애나 대학교는 전공 실기뿐 아니라 음악 이론으로도 엄격한 수준을 요구했던 학교였다. 때문에 2년 안에 학위를 마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어려운 시기에 용단을 내린 유학의 길인만큼 이를 악물고 후회 없이 공부해 음악적 성장을 꾀하기로 작정했고, 석사학위도 2년 안에 마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녀는 입학한 첫 학기, 얼마 되지 않아 겁 없는 도전에 나섰다. 인디애나 대학에서의 협연 오디션에 도전하기로 한 것이다. 연습에 매달리던 그녀를 본 지도 교수가 결과에 연연하지 말라고 조언했던 결전의 날이기도 했다. 김재미는 또 한 번 기가 막힌 우연과 마주쳤다. 오디션 당일이 정확히 어머니의 기일 1주년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오디션 당일이 어머니 기일 1주년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하늘에 계신 어머니께 좋은 결과를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런데 아침에 물을 마시려는데 컵을 놓쳐 그만 유리컵이 깨져버렸다”고 에피소드를 밝히며 “안 그래도 예민한 신경과 긴장감이 돌던 때에 마음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당시 오디션에는 이미 내로라하는 연주자들이 많았고, 당연히 그 사람들 중 하나가 되겠지하며 그저 음악에만 집중하고자 노력하면서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기적처럼 내가 되었다. 당시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한국 사람이 선정된 것은 처음이라며 어머니 기일에 이뤄낸 이 감동적인 날을 주변의 선배들도 함께 울면서 기뻐해줬던 기억이 난다. 정말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고 말했다.
그녀가 학위를 마치는 데 걸린 시간은 예정보다 2개월 빠른 불과 1년 10개월이었다. 그 뒤에는 보스턴으로 박사 과정을 떠나려 했지만, 우선은 한국으로 돌아오라는 아버지 애원에 따라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정신없는 생활이 이어졌다. 연주 일정과 강의 일정이 쏟아졌고, 바쁜 와중에 남편을 만났다. 결혼 생활을 하던 때라 5~10년이 걸리는 박사 과정을 하기 위해 한국을 떠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7년 정도 시간이 휙 가 버렸다. 그동안 가족도 생겼고, 아기도 있고, 연주와 강의 등 바쁜 일정 속에 살았다. 무언가 알맹이가 빠져버린 듯 허전함이 있어, 음악에만 집중해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현실을 다 버리고 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 늘 목말라하며 고민만 거듭했다. 그러다 나이 서른셋 되던 어느 날 평생 남을지도 모를 아쉬움에 홀연히 다 버리고 다시 유학길에 올랐다.”
오로지 음악과 자신을 위해 떠난 그곳에서 김재미는 즐겁게 공부했다. 아이와 가족이 늘 그리웠지만, 고팠던 자신의 음악 공부한다는 것이 진심으로 행복했다. 그녀는 “음악에 대해 더 알아가며 생각하고 연습하는 게 정말 좋았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이산가족이 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이번에도 그녀는 최대한 빨리 마무리를 짓고 돌아와야만 했다. 김재미는 집중해서 가능한 단시간에 학위를 끝낼 수 있도록 모든 수업과정은 물론이고, 교수님과 상의하면서 논문도 미리 준비하는 등 최선을 다했다. 덕분에 보통 4~5년 이상 걸리는 박사 과정을 전무후무하게 기적처럼 거의 3년, 2년 10개월 만에 마치게 됐다.
하지만 2년 10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모든 것을 쏟아 부은 탓이었는지 귀국 후 서울 생활에 적응이 잘 되질 않았다. 허무함이 그녀를 짓눌렀다. 김재미는 당시에 대해 “하나에만 너무 몰입해 다 소진하고 나서인지 모든 것에 의욕을 잃고 지쳐서 혼자 울었던 기억도 있다. 한국에 돌아왔더니 그 동안 에너지가 고갈된 나를 챙겨줄 사람은 아무도 없고 내가 챙겨야 할 사람들만 많아 힘들었다”고 말했다. 남편도, 아기도, 시댁도, 아버지도 다 잘 챙겨야 하는 입장이었던 그녀에게, 더 이상의 기력과 의욕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우울을 더욱 깊게 만들었던 것은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신 탓도 컸다.
당시에 대해 그녀는 “발버둥 칠수록 늪에 빠지는 느낌”이라고 대답했다. 김재미는 우울함과 무기력증을 어렵게 버티면서 “이렇게 무너지면 안 된다”며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되새겼다. 그렇게 1년 이상 힘든 시간을 보냈다. 결국엔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려운 순간들을 극복해 냈다.
“삶,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하며 균형감을 지키고자”
김재미는 이제껏 후회 없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왔다. 무엇이든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마음으로 몰두하며 지낸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철학에 대해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하자”라며 입을 열었다.
“최선이란, 나 자신에게 당당할 수 있도록 매 순간마다 최고의 ‘선’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가장 중요한 건 열정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과 열정을 평생 잃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절실히 느끼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삶의 균형감이다. 인생을 합창에 비유하자면 이렇다. 합창은 다양한 성부가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 어떤 순간에는 어느 한 성부가 집중되고 다른 성부들이 뒤에서 받쳐주기도 한다. 또 어느 때는 다른 파트에 집중되기도 하며 때로는 동시에 어우러지기도 한다. 삶도 마찬가지다. 모든 부분이 다 함께 가지만 어떤 순간에는 어떻게 선택하고 집중해서 조화를 이루도록 할 것인지 책임져야 한다. 삶의 조화를 만드는 ‘지휘’와 같다. 인생에서 그러한 밸런스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음악은 삶의 노래, 고통까지 품을 수 있어야
음악 철학에 대해서 묻자 그녀는 “음악 안에 삶이 있다. 작곡가의 음악에 그들의 삶과 철학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듯이 연주자도 마찬가지다. 연주자의 가치관과 삶이 묻어나는 소리를 표현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물론 아름다운 소리를 찾게 된다. 그러나 단지 예쁘고 고운 소리뿐 아니라 ‘우리의 삶에 있는 고통까지 다 품어 아름다운 소리로 승화시킬 수 있는 음악’, ‘살아있는 열린 소리, 생명력이 느껴지는 가슴 뭉클한 음악’을 하고 싶다”고 전했다.
피아니스트인 김재미가 느끼는 ‘피아노’라는 악기의 매력은 무엇일까. 그녀는 “사실 피아노 건반을 만질 때 온 마음과 정신을 담아 집중해서 울리면 ‘영혼의 울림’을 느낄 수 있다. 차가운 건반악기에서 생명의 온기를 느끼는 따뜻한 소리가 날 때, ‘살아있는 생명의 소리’를 낼 때, 엄청난 감동이 밀려온다”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래서인지 김재미는 평소 ‘소리가 따뜻하고 울림이 있다’는 평가를 많이 듣는다. 그녀는 “혼이 담긴, 생명력이 느껴지는 살아 있는 음악이 좋다. 더 잘 치고 못 치고를 떠나서 타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며 말을 이었다. “클래식의 감동이 그것이다. 시공을 초월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다 담겨 있다. 그냥 눈물이 나거나, 뭉클해지거나, 따뜻해 질 수 있는 것들 말이다. 기악에는 가사가 없다. 그래서 소리 자체가 수많은 것을 내포한다.”
인간의 고통까지 품은 아름다운 연주를 꿈꾸는 김재미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은 무엇일까. 그녀는 “한곡만 꼽기는 어렵다”며 생각에 잠겼다. 잠깐의 정적 속에 그녀가 꺼내놓은 이름은 ‘리스트와 슈만’이었다. 그녀는 “개인적으로 작곡가 리스트의 ‘고독속의 신의 축복’이란 곡을 좋아한다. 많이 알려진 곡은 아니다. 듣기에는 화려하거나 요란하지 않고 리스트의 전형적인 곡 스타일도 아니다.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감동이 좋다. 리스트의 음악은 기교적으로 어려운 곡들이 많다. 이곡은 듣기에는 편안하지만 피아니스트에게는 마치 물 아래에서 열심히 발버둥치며 물위로 고요해 보이는 백조같이 느껴지는 곡이다.”고 말했다. 이어 “또 좋아하는 곡 중에 하나가 바로 슈만의 ‘판타지’다. 피아노 문헌에서 가장 큰 대곡 중 하나로 슈만이 클라라라는 부인과 결혼하기 전 겪었던 고난과 러브스토리를 품은 곡으로 그의 감정이 문학적으로 곡에 녹아 있다. 특히, 단순한 패턴처럼 보이는 마지막 악장에는 수많은 감정의 파노라마가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좋은 음악을 나누는 것이 목표
피아니스트 김재미가 꿈꾸는 음악가로서의 목표는 분명하다. ‘좋은 음악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것은 연주를 통해서이기도 하고, 교육을 통해서이기도 하다. 그녀는 현재 건국대학교 사범대학 음악교육과 교수로 활동 중이다. 김재미는 “음악을 통해 청중들과 나누고 제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 제자들 중에서도 다른 사람에게 음악을 가르칠 사람들이 많다. 오래전부터 음악 교육에 대한 갈망이 있었고, 앞으로도 사명감을 갖고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제자들에 대해서도 애틋한 마음을 더했다.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임용이 되기 위해, 교수가 되기 위해, 어떤 성공을 위해 음악을 하는 학생들이 있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음악을 공부하면 그 길고 험난한 길을 걸어가는 동안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경우 지치고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말해준다. 대신 제대로 음악을 공부하고, 이해하며 음악을 사랑하게 되면 그 시간들이 쌓이면서 분명히 자신이 원하는 연주자도 될 수 있고, 꿈도 이룰 수 있으리라 조언해 준다.”
피아노는 나의 인생의 동반자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피아노’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물었다. 그녀는 “인생에서 스스로의 자아를 표현했던 것은 피아노를 통해서였다. 앞으로도 다른 사람과 소통하며 봉사할 수 있는 것도 ‘피아노 음악’이다. 이런 의미에서 함께하는 ‘동반자’가 아닐까 싶다. 내게는 음악, 피아노에 대한 절대적인 삶의 뿌리가 있다”고 말했다.
김재미는 국내외 다양한 독주와 협연, 교육 및 심사활동 등을 통해 앞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 나갈 예정이다. 그녀는 “여러 가지 일이 많다 보니 연습하는 시간을 갖는 게 어렵다. 앞으로도 균형을 잘 맞춰서 해나가려고 한다”며 “고인 물은 썩는다는 말이 있다. 꾸준히 하되, 어제와 오늘이 조금 다를 수 있게 늘 새로운 생각을 하려고 한다”고 단단한 계획을 전했다.
피아니스트 김재미(Kim,Jaemi)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예원 서울예고, 서울음대를 실기수석 및 우등졸업하고 미국 인디애나 대학 석사, 매릴랜드 대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고 오정주교수 추모장학생으로 선발되었고 모교를 빛낸 공로상(서울예고)수상과 동아콩쿨1위를 비롯하여 국내 다수 콩쿨을 석권했고 미국 Indiana 대학콩쿨1위, Homer Ulrich Competition 1위, Maryland 대학콩쿨 1위, TCU/Van Cliburn Concerto Competition1위, 이태리 IBLA국제콩쿨(Liszt 특별상)등에서 우승하며 그 재능을 인정받아 왔다. .
조선일보 신인음악회에 데뷰하였고 교향악 축제를 비롯, 서울시향, 대구시향, 수원시향, Indiana. Univ.. Orchestra, Maryland Univ. Orchestra, Texas Fort Worth Orchestra, 폴란드 Krakow Orchestra, 러시아 Rimsky-Korsakov Orchestra, 체코 Karlsbad Symphony Orchestra와 협연한 바 있으며 일본 시즈오까Odessey Hall, 미국 Texas Ed Landreth Auditorium과 러시아 쌍트페테르부르그 백야축제, 키시코 국제 음악제에 한국대표 피아니스트로 초청되었고 일본 Tokyo Suntory Hall, Japan Times Hall, 중국 Beijing Hall에서 연주하며 국내외 수차례 초청연주를 가졌다. 또한 Norman DelloJoio 피아노 독주곡집을 녹음(ELAN82420)하여 미국, 스위스, 영국등에서 출시되어 호평받은 바 있다.
현재 건국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피아노4季’등 다양한 테마의 기획 독주회를 중심으로 의욕적인 연주활동을 펼치면서 한국예술평론가협회 심사위원 특별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하였고 뉴욕,동경등 해외에서도 매년 독주회를 통해 활발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와우스타 정지혜기자 wowstar3@wowtv.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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