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 본관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이 이중섭의 편지그림을 감상하고 있다.
지난 1일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 본관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이 이중섭의 편지그림을 감상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며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한국의 대표 화가 이중섭(1916~1956)을 지탱해준 건 바로 가족이었어요. 그가 가족 그림을 유난히 많이 그린 것도 이런 까닭이죠. 가족을 소재로 한 그의 작품은 역사적 수난을 대변한 또 다른 희망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아내와 자식을 일본에 보낸 후 그린 작품 ‘길 떠나는 가족’ 앞에 서면 울음이 복받치기도 해요.”

박명자 갤러리현대 회장의 말이다.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꿋꿋이 가정을 지켰던 이중섭 화백의 그림과 편지를 모은 전시회가 겨울 화단을 달구고 있다. 지난달 6일부터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이중섭 사랑, 가족’전에는 개막 25일 만에 2만여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국내 최대 전시공간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연간 관람객이 100만명 수준인 것을 고려할 때 상업화랑의 기획전에 이처럼 인파가 몰린 것은 이례적이다. 가족애가 화두가 된 영화 ‘국제시장’의 흥행 기운이 화단으로 옮겨붙고 있다는 게 미술계의 평가다. 미술평론가 윤진섭 씨는 “그동안 고흐(82만명)를 비롯해 로뎅(35만명), 샤갈(55만명) 등 해외 유명 화가 전시에 수십만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는데, 국내 작가를 조명하는 전시에도 관람객이 북적이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말했다.

국내 미술시장의 대표 작가가 펼쳐놓은 ‘상상력의 아이콘’이어서인지 자녀와 함께 전시장을 찾은 가족과 미술 전공자, 외국인 관람객이 줄을 잇고 있다. 전시장 벽면 일부에 설치된 ‘이중섭에게 한마디’ 코너에는 가족 사랑, 작가에 대한 존경의 마음 등을 적은 수많은 노란색 쪽지가 붙어 있어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가족의 재회와 행복, 평화를 그림에 담아낸 이중섭이 한국 화단에 끼친 영향 때문에 전시장 분위기는 사뭇 진지했다. 미술을 공부하는 딸과 전시장을 찾은 정주성 삼성물산 전무는 “이 화백의 가족 그림에는 가난과 이별 등 비극에 마침표를 두지 않고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함께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수정 갤러리이즈 관장은 “시대의 어두운 그늘을 온몸으로 그린 그의 작품은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지극히 밝은 희망을 살려내려는 불쏘시개 같은 것”이라고 했다.

관람객의 발길이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은 2층에 전시된 1971년작 ‘길 떠나는 가족’ 앞이다. 연극으로 공연돼 많은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은 이 작품은 부인과 두 아이를 일본에 보내고 난 뒤 가족과의 행복한 삶을 위해 따뜻한 남쪽 지역으로 이사가는 모습을 차지게 그린 작품이다.

대학생 김지현 씨(21·서울 하왕십리동)는 “그림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며 “가족이 주는 행복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감탄했다. 애틋한 가족 사랑을 그림과 글로 쓴 편지화 앞에도 관람객이 북적인다. 서울에서 여행업을 하는 김영석 씨는 “이중섭이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 ‘아빠는 닷새간 감기에 걸려 누워 있었다. 열심히 그림을 그려 돈과 선물을 잔뜩 사갈 테니 건강하게 기다리고 있어 주세요’라고 적힌 내용을 보고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1955년 주한미국대사관 문정관이었던 아서 맥타가트가 이중섭의 개인전에서 구입한 은지화 세 점 앞에 이어진 줄도 길다. 담뱃갑 속 은박지에 그린 가족 이야기에서 진솔하고 애틋한 가장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박 회장은 “출품작은 모두 개인 소장자에게서 빌려온 것으로, 한국 미술 거장의 작품을 공유할 수 있어 기쁘다”며 “25일간 누적 관람객 수를 보면 장욱진(2011), 김환기(2014)전보다 이중섭전이 앞선다”고 말했다. 이 화백의 유화, 편지화 등 70여점으로 꾸민 이 전시는 1주일 연장해 내달 1일까지 이어진다. 미술평론가 최석태 씨가 3일 오후 2시부터 ‘이중섭 미학’을 주제로 특강한다. 관람료 5000원. (02)2287-3500

김경갑 기자 kkk10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