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간 '썸'타던 이채원-삼성전자, '결별도장' 찍기 직전
이채원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 부사장(사진)은 ‘가치투자’의 대명사다. 저평가된 우량주를 발굴, 가격이 오를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10년 가까이 변하지 않는 짧은 머리스타일이나 안경만 봐도 쉽게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는 게 그의 투자 철학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부사장은 최근 삼성전자와의 동거를 끝냈다. “삼성전자도 가치주”라며 한국밸류10년투자펀드 자산의 20% 이상을 투자했던 삼성전자 비중을 작년 10월부터 2% 밑으로 떨어뜨렸다. ‘삼성전자는 더 이상 가치주가 아니다’고 판단한 것이다.

○4년 만에 삼성전자 처분

펀드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이 부사장이 직접 운용하는 밸류10년펀드의 투자 비중 상위 10개 종목 안에 삼성전자가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상위 열 번째인 메리츠금융지주의 투자 비중은 2.17%. 결국 삼성전자의 투자 비중이 2.17% 미만이란 답이 나온다. 작년 9월 말까지만 해도 밸류10년펀드의 삼성전자 투자 비중은 14.94%로 펀드 내에서 가장 컸다. 이 부사장은 “정확한 수치를 밝힐 순 없지만 작년 4분기부터 삼성전자 비중을 크게 줄인 것은 맞다”고 말했다.

가치투자가인 이 부사장이 삼성전자를 처음 산 것은 2010년 10월. 그해 7~8월 80만원을 넘었던 삼성전자 주가가 70만원대 초반으로 내려온 시기다. 삼성전자가 그해 6월 갤럭시S를 출시했지만 애플의 공세에 ‘위기론’이 불거질 때였다. 다른 펀드들은 삼성전자 주식을 다 팔거나 비중을 대폭 줄였지만 이 부사장은 사상 처음으로 삼성전자 주식을 샀다.

‘삼성전자의 경쟁력 대비 주가가 저평가돼 있다’는 판단에 이 부사장은 삼성전자 주식 비중을 계속 늘렸다. 밸류10년펀드의 삼성전자 투자 비중은 2012년 6월 10%를 넘겼다. 갤럭시S 시리즈의 연이은 성공으로 삼성전자 주가는 2011년 11월 100만원을 넘긴 뒤 2013년 2월엔 150만원까지 치솟았다. 밸류10년펀드의 수익률도 상승세를 탔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8년 11월 투자자들에게 손실 발생에 대한 사과문까지 썼던 이 부사장의 명성은 이때부터 다시 부활했다.

○‘삼성전자=가치주’ 소신 바뀌어

4년간 '썸'타던 이채원-삼성전자, '결별도장' 찍기 직전
작년 8~9월까지만 해도 이 부사장은 “삼성전자는 아직 저평가됐다”는 소신을 버리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한 달 만에 삼성전자 주식을 대거 처분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로 급감한 삼성전자의 실적을 들 수 있다. 삼성전자가 작년 4분기에 영업이익 5조원을 회복했지만 2013년 4분기에 비해선 여전히 37.4%나 적은 규모다. ‘주가가 싸다고 해서 가치주는 아니다’라는 생각을 가진 이 부사장이 계속 보유하기엔 부담스러웠을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익 규모를 예상할 수 없는 회사는 좋은 회사가 아니다’라는 그의 투자원칙이 작용했다는 설명이다. 최근 부쩍 커진 삼성전자의 주가 변동성과 불확실한 지배구조도 이 부사장의 삼성전자 처분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이 부사장이 삼성전자를 처분한 이후 삼성전자 주가는 공교롭게도 상승세다. 작년 10월 100만~110만원대에서 움직였던 삼성전자 주가는 22일 현재 137만8000원을 기록 중이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