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윤(오른쪽)은 최근 마스터클래스를 통해 발탁한 최인식 씨에 대해 “뚝심과 성실함을 갖춘 성악가”라고 말했다.
사무엘 윤(오른쪽)은 최근 마스터클래스를 통해 발탁한 최인식 씨에 대해 “뚝심과 성실함을 갖춘 성악가”라고 말했다.
동양인 최초로 독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오페라 주역을 맡은 세계적인 성악가 사무엘 윤(윤태현·44·베이스 바리톤)의 윗옷 주머니에는 작은 수첩이 항상 들어 있다. 수첩엔 그가 유럽에서 만난 한국 학생들의 이름과 연락처, 고민, 소망 등이 적혀 있다. 윤씨는 유럽에서 매년 200명이 넘는 한국 학생을 만난다. 고민 상담도 하고 오디션도 주선해 준다. 그렇게 수첩에 쌓인 학생들의 소망은 1000개 이상이다. 윤씨는 생각날 때마다 수첩을 펼쳐보며 그 소망이 이뤄지기를 기도한다.

최근 서울 정동에서 만난 윤씨는 “이 수첩이 저를 지탱하게 하는 버팀목”이라고 말했다.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기도하고 응원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반대로 그 사람들이 저를 위해 기도하고 응원해주는 것이기도 하죠. 이런 응원 덕분에 웬만한 무대에서도 떨지 않는 자신감과 담대함이 생겼습니다.”

그가 지난 7, 9일 한국에서 마스터클래스를 연 것도 이런 생각의 연장이다. 종신단원으로 속한 독일 쾰른 오페라극장에서 운영하는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 ‘쾰른 오펀 스튜디오’의 참가자를 뽑기 위한 자리였다. 이 프로그램엔 그동안 호주 오페라파운데이션이 주최하는 콩쿠르 우승자가 참가했지만 2년 전부터 지원이 끊겨 공석이었다. 윤씨가 극장장을 설득해 올해는 한국 학생을 뽑게 됐다. 필요한 비용은 윤씨의 부탁을 받은 김영호 일신방직 회장이 후원하기로 했다.

마스터클래스를 통해 기회를 잡은 사람은 바리톤 최인식 씨(26·연세대 성악과 4년)다. 최씨는 2007 경희대 콩쿠르 2등, 2008 이화경향콩쿠르 3등, 2008 고태국 콩쿠르 1등을 차지했고 내달 졸업을 앞두고 있다. 인터뷰에 함께한 최씨는 “기분이 좋은 걸 넘어 황홀할 정도”라며 “성악가로서 한 발짝 내디딜 수 있게 도와주셔서 감사하다”고 소감을 말했다.

윤씨는 “음악에 대한 겸손함과 힘든 상황에서도 잘 견뎌낼 수 있는 뚝심이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봤다”고 설명했다. 지금은 세계적 성악가로 이름을 알린 윤씨지만 그 역시 오랜 시간 무명 시절을 겪었다. 1998년 이탈리아의 토티 달 몬테 국제 오페라 콩쿠르에서 우승하기 전까지 십수 차례 낙방을 겪었다. 독일 쾰른 오페라 극장으로 소속을 옮겼지만 독일어를 한마디도 못해 처음에는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그가 일약 스타로 떠오른 것은 2012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이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주역이었던 바리톤 예프게니 니키틴이 몸에 새긴 나치 문신 때문에 하차하면서 윤씨는 최종 리허설 5시간 전 주역으로 발탁됐다. 이때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하며 3년 연속 페스티벌에서 주역을 맡았다. 올해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방황하는 네덜란드인’과 ‘로엔 그린’을 공연한다.

“기다린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에요. 저도 몇 년 동안 단역에 머물렀죠. 하지만 꿈과 비전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언젠가 기회가 찾아옵니다.”

윤씨는 오는 23일 오후 8시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사무엘 윤의 바이로이트의 영웅’이라는 이름으로 공연을 한다. 구노와 바그너 등의 오페라 아리아를 선보인다. 그는 “사무엘 윤이 지금까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진솔하게 보여주려고 한다”고 말했다. 5만~12만원. 070-8879-8485

글·사진=이승우 기자 lees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