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의 산업정책 읽기] R&D 관료의 유체이탈
한국은 전 세계에서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R&D) 투자 비중이 가장 높다. 그런 나라가 아예 온갖 평가로 날을 지새우겠다고 작정한 모양이다. 보건복지부가 연구과제 선정 시 연구내용만 놓고 평가하는 ‘암맹평가(블라인드 리뷰)’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연구계획서에 연구책임자의 인적사항 등을 삭제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공정성 제고! 역시 ‘평가공화국’답다.

왜 성과가 없냐고?

지금도 각 부처들은 공정하게 한답시고 평가위원 풀을 잔뜩 넓힌 다음 랜덤(random) 추출 방식으로 평가를 한다. 진짜 전문가들이 이런저런 제척사유로 배제되면 소위 ‘듣보잡’만 모여 평가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제는 이것마저 성에 안 차는지 ‘암맹평가’까지 등장했다. 선진국들이 신뢰를 바탕으로 전문성 중심 평가로 가는 것과는 정반대다. 이럴 바엔 차라리 제비뽑기로 연구과제를 나눠주지 그러나. 정부가 공정성이라는 미명 하에 ‘경제 민주화’ 굿판을 벌이더니 이제는 ‘R&D 민주화’ 쇼까지 벌일 참인가.

기획재정부, 미래창조과학부, 산업통상자원부 등이 중심이 돼 ‘R&D 대(大)혁신방안’을 내놓는다고 한다. 18조원의 정부 R&D 예산을 투입하는데 왜 성과가 안 나오는지 그 해법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졸지에 관료들은 개혁자, 연구자들은 피개혁자가 됐다. 지금까지 누가 R&D 예산을 배분하고 평가를 좌지우지했는지 일체의 기억이 지워지기라도 한 건가. 가장 먼저 자아비판을 해도 부족할 관료들의 유체이탈식 접근이다.

관료들도 정부가 R&D 투자를 하는 이유가 뭔지 모르진 않을 것이다. 기업은 자신이 거둘 수익만 보고 R&D 투자를 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적정 투자규모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게 그 출발점이다. 시장실패를 보완한다는 취지다. 장기간이 소요되거나, 공공성격이 짙거나, 위험성이 높거나, 파급효과가 크거나 등의 합당한 투자 기준을 고민하는 것도 바로 그래서다. 우리 관료들은 이 기준에 얼마나 충실했나. 예산배분 권한을 틀어 쥔 기재부는 물론이고, R&D 예산을 가진 부처들은 한번 답을 해 보라.

선진국일수록 관료들이 R&D에 미주알고주알 개입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관료란 기본적으로 실패를 최소화하려는 집단이다. 이를 위한 온갖 규정집들이 산처럼 쌓이면서 관료제는 비로소 완성된다. 실패를 무릅써야 할 R&D와는 맞으려야 맞을 수가 없는 것이다. 선진국일수록 ‘연구의 자율성’ ‘연구자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것도 바로 그래서다. 자율성을 주고 책임을 물어야 연구자들도 억울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땅의 관료들은 어떤가. 성과가 나올 수 없게끔 제도를 만들고 온갖 간섭은 다 하면서 왜 뭐가 안 나오냐고 떠들고 있지 않은가.

관료들이여, 이젠 손 떼라

정부는 R&D 예산을 늘렸다지만 연구현장은 전혀 다른 분위기다. 정작 연구할 사람은 없고 장비만 쌓여간다. 정부출연연구소만 해도 국가적 미션 수행은커녕 정원 통제에 묶여 뜨내기로 취급받는 비정규직들의 집합소로 전락하고 말았다. 말이 연구중심대학이지 이 땅의 대학원들도 죽어가고 있다. 대기업이나 실력 있는 중소기업은 시시콜콜한 간섭이 싫다고 정부 R&D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결국 R&D 예산 증가로 가장 행복한 집단은 누구인가. 돈 나눠주며 통제하고 간섭하는 관료들이다. 이 틀을 깨지 않는 한 정부 R&D 혁신은 없다.

안현실 논설·전문위원·경영과학博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