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삼성동 코엑스에서 ‘시간선택제 일자리 채용 박람회’에서 구직자들이 채용 게시판을 보고 있다.
2013년 삼성동 코엑스에서 ‘시간선택제 일자리 채용 박람회’에서 구직자들이 채용 게시판을 보고 있다.
드라마 ‘미생’에는 두 슈퍼 우먼이 등장한다. 종합상사 원 인터내셔널의 알파걸(남성과 동등하거나 더 뛰어난 능력을 갖춘 여성) ‘안영이’와 잘나가는 워킹 맘 ‘선 차장’이다. 강인함으로 중무장한 이 둘은 남성 일색인 종합상사에서 끈질기게 버텨낸다. 그리고 ‘에이스’가 된다. 하지만 그런 그들에게도 고뇌는 있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언어폭력·성차별을 참아내야 하고 일과 가사·육아를 병행하며 회사 눈치까지 봐야 하는 버거움과 서러움이다. “워킹 맘은 죄인이다”며 자조하는 선 차장의 이야기에 많은 여성들이 공감하는 것은 대한민국 여성 직장인들의 현실과 좌절, 그럼에도 존재하는 희망이 절절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먼 파워 시대의 단면이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늘며 슈퍼 우먼들이 대거 등장했다. 진출 분야는 식품·화장품·서비스업에서 정보기술(IT)·화학·건설·금융까지 다양하다. 포지션 역시 신입 사원부터 고위 관리직까지 전면에 여성 인력이 배치됐다. 단적인 예로 2013년 30대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57%(남성은 93.2%)로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하지만 화려할 것만 같은 그녀들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남녀 간 격차, 출산·육아 등 고민거리가 하나둘이 아니다.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이 있는 여성 인력은 기업이 주목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자원임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점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 있다.

여성 고용률, OECD 국가 중 바닥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저 수준의 출산율과 급격한 고령화에 따라 경제활동인구가 감소하고 있다. 여성 인력이 필요한 이유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여성 고용률이 OECD 주요국에 비해 현저히 뒤처져 있다. 한국 여성 고용률은 53.9%로 OECD의 평균(57.5%)에도 못 미치며 OECD 회원국 34개국 중 25위 수준이다.
이 같은 결과를 초래한 것은 30~40대의 경력 단절 현상이 크다. 20대는 여성들의 고용 참가율이 남성보다 높지만(2013년 기준 여성 62%, 남성 61.2%) 30대가 되면 결혼과 출산·양육으로 인해 경력 단절이 일어난다. 통계청이 발표한 ‘경력 단절 여성(경단녀) 통계’에 따르면 2014년 4월 기준 15~54세 기혼 여성 중 직장을 그만둔 경단녀는 213만9000명이다. 전체 기혼 여성 5명 중 1명꼴로 결혼과 출산·육아 등의 이유로 직장을 포기한 것이다. 경력 단절은 학력이 높을수록 심해진다는 분석이다.

경단녀는 여성 취업 인구의 ‘임금 수준’에도 영향을 미친다. 남성은 임금 수준이 40~44세에 월평균 300만 원 정도로 정점을 찍는다. 반면 여성의 임금 곡선은 30~34세에 월 200만 원으로 가장 높고 30대 후반 이후로는 더 이상 증가하지 않는다는 분석이다.

30~40대의 경력 단절로 대부분의 기업엔 여성 중간 관리층이 구멍이 난 상태다. 여성들은 조직 내 롤모델이 없어 장래가 불안하고 자신의 성장 가능성에 대해 확신이 없어진다. 여성 임원이나 여성 최고경영자(CEO)보다 중간 관리자 이상의 여성 인력 풀을 만드는 게 급선무라고 강조되는 이유다.

이런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아예 결혼 또는 출산을 미루는 경우도 늘고 있다. 일산 사법연수원의 한 부장판사(교수)는 여성 판사인 후배들이 결혼을 ‘못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결혼 후 출산·육아 등으로 회사에 누를 끼칠까봐 미리부터 염려하며 눈치를 주는 선배들의 압박으로 아예 결혼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결국 출산율을 저하시킨다. 외과 레지던트 3년 차인 이지영(33·서울 장충동) 씨는 2년 전 결혼했지만 아직 아이가 없다. ‘레지던트 기간 동안 임신을 하지 않는다’는 채용 조건 때문이다. 딱히 계약서에 쓰인 내용은 아니지만 암묵적으로 합의해야 하는 이런 이면 계약은 사실 놀랄 일도 아니다. 그 어느 병원엘 가나 마찬가지다. 만약 아이가 생긴다면? 바로 ‘아웃’이다.

제자리 맴도는 개선 대책

송명희 한국여성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보통 고학력·전문직에서 여성의 경력 단절이 심하게 나타나는데, 이들의 복귀는 서비스·단순노동·판매직 중심으로 이뤄져 경제적 손실이 클 뿐만 아니라 ‘실망 실업자’가 증가하는 추세”라고 지적했다. 이어 “경력 단절로부터 오는 경제적 손해가 커 이에 대해 부담을 느낀 여성들이 결국에는 출산을 기피하고 있다”며 “저출산은 경제 전반의 활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말했다.
만약 이런 문제가 해소된다면, 경단녀들이 직장을 그만두지 않고 경제활동을 지속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LG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12년 기준으로 경력 단절 여성이 직장을 그만두지 않고 경제활동을 지속하는 경우 전체 여성의 고용률은 약 10% 이상 상승한다. 이때 여성의 근로소득도 276조5000억 원으로 60조2000억 원 증가한다. 여성이 출산·육아 및 가사 부담으로 직업을 포기하면서 발생하는 잠재적 소득 손실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도 15조 원의 금액을 벌어들일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연구원은 여성의 경제활동 포기에 따른 사회적 비용이 매년 15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했다. 경력 단절 이후의 임금 손실액만 연간 9조 원에 이른다고 밝혔다. 재취업을 하지 못한 경단녀의 숫자와 이들이 이전 직장에서 받았던 임금, 경력 단절 기간을 따진 수치다. 또 이전 직장보다 낮은 임금으로 생긴 손실액, 재취업 교육 훈련비용 등도 사회적 비용에 포함된다.

이런 막대한 손실을 줄이기 위해서는 여성에 대한 균등한 기회 부여와 여성이 일하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 이상구 복지국가 소사이어티 대표는 “국내 여성 인력은 교육 수준이 높기 때문에 경력 단절만 줄여도 생산 가능 인구 감소를 보완해 줄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50~60대 은퇴한 장년층 등 취업 소외 계층의 일자리 해소도 관건이다. 문제는 저임금, 비정규직의 단순노동 일자리가 대부분이라는 게 한계다. 그래서 모든 여성 인력을 위한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이 대표는 “현재 한국 여성들의 일자리는 10%만이 좋은 일자리고 나머지 90%가 나쁜 일자리라고 볼 수 있다”며 “향후 의료 부문에서 39만 개, 교육 부문에서 13만7000개 등의 일자리가 생긴다는 통계가 있다”고 설명했다.

제도적 개선도 필요하다. 여성들이 일과 출산·육아를 병행할 수 있도록 탄력근로시간제·재택근무·시간선택제 등 다양한 근무 형태를 보장하는 국가·기업·사회의 노력이 필요하다. 인식의 전환도 필요하다. 남성 중심의 기업 문화도 바꿔야 한다. 여전히 채용·인사·승진에서 남녀 격차를 두고 여성이 불리한 경우가 많다. 한국은 여성의 고위직 승진을 가로막는 ‘유리 천장 지수(GCI)’가 OECD 국가 중 가장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11년 26개 국가에 대한 GCI 순위를 매긴 결과 한국은 26위로 최하위였다.

국내 기업들은 왜 많은 다국적기업이 한국의 여성 인력을 높이 평가하고 중용하는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또 권위와 강함을 상징하는 남성적 리더십은 과거의 유산이 됐고 부드럽고 포용하는 여성적 리더십이 사람을 움직이는 시대다. 여성 인력 확대와 이를 위한 제도 개선은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도 가장 시급히 추진해야 할 과제다.

김보람 기자 boram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