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 계좌에 돈을 넣어 두자니 금융소득종합과세 대상이 되고, 자식 계좌에 분산 예치하려니 불법 차명거래에다 증여세 문제 때문에 아예 뭉칫돈을 빼가는 자산가가 늘고 있습니다.”

[금융 차명거래 전면금지] "놔뒀다가 피해볼라"…거액자산가들 예금탈출 행렬
한 시중은행 프라이빗뱅커(PB)가 전한 요즘 자산가들의 분위기다. 연 1%대에 불과한 이자를 받으려고 예금하는 것보다는 골치 아픈 세금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거액 예금을 인출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거액 예금 탈출은 이미 본격화됐다. 국민 신한 우리 하나 등 4대 시중은행의 잔액 5억원 이상 개인 정기예금은 지난 9월 말 기준 16조1910억원이었다. 지난 3월 말(17조1570억원)보다 9660억원 줄어든 규모다. 6개월 새 1조원 가까이 빠졌다.

그동안 거액 예금 이탈의 가장 큰 원인은 기준금리가 인하되면서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고려한 실질금리가 마이너스로 접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최근엔 29일 시행을 앞둔 차명거래 원천금지 조치가 예금 이탈을 부추기고 있다는 분석이다. 거액 예금을 해봐야 이자나 세금 측면에서 도움될 것이 없다는 판단에서다.

예금에서 빠져나간 돈 가운데 일부는 배당주펀드 등 투자상품과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으로 금융권은 보고 있다. 리스크를 감수하고라도 수익을 낼 수 있는 상품에 투자하겠다는 심리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금으로 금괴를 사두거나 은행 대여금고와 장롱 속에 보관하는 자산가도 늘고 있다는 게 PB들의 얘기다. 또 다른 은행 PB는 “거래 내역을 노출하는 것 자체를 꺼리는 분위기가 강해지고 있다”고 전했다. 일단 ‘소나기는 피하자’며 돈을 빼놓고 보자는 심리가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차명거래를 원천금지하는 개정 금융실명거래법이 시행되면 예금 이탈 현상은 가속화할 가능성이 크다는 게 업계 분석이다. 한 은행 관계자는 “지하경제를 양성화하겠다는 법의 취지는 좋지만 오히려 지하로 숨는 자산가들이 더 늘어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김일규 기자 black041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