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해미읍성에서 솔뫼성지까지
80km 순교자의 길에 물든 史
아산 공세리성당 '아이리스' 촬영지로 유명세
순교의 아픔이 짙게 배인 해미읍성
순례자의 길의 시작은 해미읍성이다. 조선시대 충청지역의 관문이었던 해미읍성은 신유박해와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천주교 신자 수천명이 순교한 곳이다. 마침 해미읍성은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역사의 아픔과 무관하게 사람들의 얼굴은 웃음꽃이 피어 있다. 해미읍성은 원래 예전에는 혜미내성이었다. 읍성이라고 하면 성안의 마을을 이루고 사는 모습을 연상할지 모르지만 빈번한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병마절도사가 주둔했던 곳이다. 읍성의 정문인 진남문을 지나면 수령 600년이 된 회화나무(호야나무)가 서있다. 이 나무에 천주교인들을 매달아 고문하고 성읍 서쪽문 옆에서 처형했다고 한다. 시인 나희덕은 당시의 풍경을 그림처럼 그려낸다. “가시 돋친 탱자 울타리를 따라가면/먼저 저녁 해를 받고 있는 회화나무가 보일 것입니다./아직 서있으나 시커멓게 말라버린 그 나무에는/밧줄과 사슬의 흔적 깊이 남아 있고/수천의 비명이 크고 작은 옹이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읍성의 가장 안쪽에는 동헌이 들어 서있다. 그때의 모습을 복원해 놓은 감옥이 있고 동헌 마당의 곤장 틀에는 어린 아이들이 장난삼아 곤장을 치며 웃고 있다.
순교의 피가 흔적돼 남은 자리갯돌
서산의 수많은 순교자와 기념하기 위해 만든 해미순교성지는 한국적인 풍경과 천주교 상징물들이 어울려 이색적인 풍광을 자아낸다. 성지 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자리갯돌. 원래는 읍성 옆의 개울을 건너는 돌다리였다. 천주교 신자들이 하도 지독해서 별의별 방법으로 배교를 유혹했다.
하지만 신자들은 배교 대신 순교를 선택했다. 자리갯돌 위에 순교자들을 눕혀놓고 돌로 머리를 짓이기고 잔인하게 학살했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고 핏물이 수십리까지 흘러갔다고 한다. 지금도 자리갯돌에는 그때의 피의 흔적이 남아 있다.
충남의 성지 중 아직까지도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은 솔뫼성지다. 한국의 첫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태어난 이곳은 4대에 걸쳐 성자와 복자가 나온 땅이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할아버지 김진후 비오가 해미에서 순교했고, 작은 할아버지 김종한 안드레아가 대구에서,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가 1839년 서울 서소문 밖에서, 그리고 김대건 신부가 1846년 서울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김 대건 신부의 생가는 사회질서를 어지럽힌 반역자의 표본이 돼 집을 해체하고 땅속에 묻었다가 1946년 순교 100돌을 기념해 생가를 복원하고 성지로 조성했다고 한다. 솔뫼성지는 합덕읍내를 거쳐 삽교천으로 흘러드는 물길 이름을 딴 버그내 순례길의 출발지이다.
일반인도 즐겨 찾는 공세리 성당
성당 기념관과 방문자의 집, 원형경기장을 본뜬 솔뫼아레나와 화장실 건물 등 솔뫼성지 경내 대부분 건물은 외관이 철판으로 장식돼 있다. 철판이 녹슬면서 붉은색으로 보이는데 마치 순교자의 피처럼 검붉다.
아산의 공세리 성당도 대표적인 순교성지다. 순교의 상처를 담고 있는 성당치고 공세리 성당은 대단히 아름답다. 충청도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공세리 성당은 고딕식 건축 양식으로 세워져 그윽한 분위기를 연 출한다. 신자들에게는 순교성지이지만 ‘미남이시네요’ ‘아이리스2’ 등 각종 영화 드라마 촬영장소로 유명해지면서 일반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순교지가 됐다.
어느덧 길은 어두워졌다. 긴 십자가가 그림자를 남기고 어둠으로 홀연히 묻혔다. 그 옛날 처절한 고독 속에 순교했던 길 위에 한국 관광의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고 있었다.
최병일 여행·레저전문기자 skyc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