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인물] '해동증자' 의자왕의 몰락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 하면 흔히 ‘삼천 궁녀’를 떠올린다. 하지만 ‘삼국사기’에 따르면 의자왕은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릴 정도로 효심이 깊고 총명하며 우애가 깊고 결단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서동요’의 주인공 무왕과 선화공주 사이에 난 아들이라는 설이 있으나 의견이 엇갈린다.

서기 642년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쳐 40여개 성을 빼앗았다. 당시 신라의 최대 거점인 대야성도 함락시킬 정도로 승승장구했다.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딸과 사위가 이 과정에서 죽었다. 그의 계속된 공세와 승전이 신라가 당나라와 밀착하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평가다.

계속되는 승리에 취한 재위 15년쯤부터는 사치와 향락에 빠졌다. “반드시 큰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간언하는 신하 성충을 가둬 죽여버렸다.

660년 당나라 소정방과 신라 김유신이 이끄는 18만 대군이 백제에 쳐들어왔다. 의자왕은 기점인 황산벌에서 계백 장군에게 군사 5000명을 주고 필사의 항전을 부탁했으나, 이들은 전멸하고 만다. 수도 사비성 함락과 함께 의자왕은 당나라로 압송돼 같은 해 병으로 죽었다.

낙화암에서 삼천 궁녀가 연달아 투신해 마치 꽃잎이 흩날리는 것 같았다는 이야기는 전설 혹은 문학적 상상력일 뿐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학계의 시각이다. 백제는 패자이고 의자왕은 망국의 마지막 군주이며,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 의자왕

599년 출생(추정), 632년 태자 책봉, 641년 즉위, 642년 대야성 함락, 660년 7월18일 나당연합군에 항복

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