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수입대체산업화 선택, 무역 규제 통해 성장 노렸지만
군부정권 포퓰리즘까지 겹쳐 90년 국민소득 증가율 0.9%
수출주도 정책 펼친 한국은 80~90년대 경제적 호황 누려
한국경제·한국제도경제학회 공동기획
지금은 상식화된 결론이지만, 수출촉진산업화 정책 아래 기업들은 해외 시장에서 정부의 보호막 없이 경쟁력을 키웠던 반면 협소한 국내시장과 정부의 보호막 속에서 성장한 산업들은 장기적으로 경쟁력을 키울 수 없었다. 물론 시간을 더 길게 보면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도 영국에 비해 산업화의 후발자였고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이들도 남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후발자로서 선발자인 영국을 추격하려는 강렬한 열망을 갖고 있었다. 다만 남미 국가의 경우 국내 소비자를 더 만족시키려는 소비재 중심 생산에 치중한 반면 독일 등은 국내 소비를 줄이도록 압박해 만든 자금으로 자본재 생산에 치중했던 차이가 있었다.
사실 1970년대 이후 동아시아의 ‘경제기적’이 있기 전까지 풍부한 자원, 서구와 비슷한 문화적 배경, 산업화의 경험을 가진 남미가 영국 독일 등 선진국에 가장 근접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그러나 수출촉진산업화 정책을 취한 동아시아는 높은 성장률을 구가한 반면 수입대체산업화 정책을 취했던 남미 국가들의 성장률은 추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남미 국가들의 제조업 성장률은 1950~1981년 연평균 6.6%에서 1981~1990년 1.1%로 떨어졌다. 물가지수도 1980년을 100으로 할 때 1990년에는 천문학적인 450만이 됐고 1인당 국민소득 증가율도 연평균 0.9%로 추락했다. 이 기간 아시아의 한국이 7.8%, 중국은 7.6% 등 경제적 호황을 누린 것과 엄청나게 대비됐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군부 권위주의 정권이 민주화되면서 나타난 남미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은 이런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수입대체산업화 정책이 남미에서 시작됐다가 퇴조한 과정(1950~1982)은 대개 이렇다. (팔머, 강명구에서 재인용)
1) 1950년대 수입대체산업화 정책의 시작: 1949년 ‘프레비시 선언(Manifesto de Ral Prebisch)’은 다음과 같은 가정 아래 수입대체산업화 정책의 시작을 알렸다. △제조업이 성장의 근원이다 △제조업 성장은 수입대체산업화를 통해 가능하다 △1차산품 수출은 동적 성장을 보장하지 못한다 △인플레는 주로 구조적 문제인 공급애로에 기인한다 △적절한 정부정책만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2) 1960~1973년 세계시장 참여를 통한 성장기회 상실: 제1차 오일쇼크가 있던 1973년까지 세계 경제는 호황이었다. 이 시기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수출주도형 산업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해 호황기 세계시장에 참여했다. 거래를 통한 윈윈을 적극적으로 실현했기에 높은 성장률을 실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수입대체산업화 정책을 택한 남미 국가들은 이런 기회를 활용할 수 없었다. 시장의 기적을 외면했던 것이다.
3) 1973년 석유위기~1982년: 1973년 석유위기로 유가가 4배나 올랐다. 흔히 이런 위기는 구조조정의 계기가 되지만 남미 국가들은 그렇지 못했다. 이 10년간 멕시코 같은 산유국이나 브라질 같은 비(非)산유국 모두 오일달러의 유입으로 수입대체산업화 정책의 파국을 유예시켜주었고 그 결과 1980년대의 파국을 더 극대화시키는 결과를 만들었다.
4)1982년 이후: 페루의 후지모리, 아르헨티나의 메넴, 멕시코의 살리나스 등 극심한 경제적 악화 속에서 포퓰리즘적 구호로 집권한 정치인들은 외채 문제 해결, 인플레 진정을 위해 고육책으로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시도했다. 그 결과 여전히 경제적 문제가 산적해 있지만 인플레이션은 억제될 수 있었다.
흔히 수입대체 정책과 수출촉진 혹은 수출공업화 정책을 정부 개입 방식의 차이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장의 기능을 이해하고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각종 규제를 없앨 것인지 여부로 볼 수 있다. 수출대체산업화 정책은 환율과 이자율이라는 가격에 대한 규제, 국가 간 거래(무역)에 대한 규제를 띠고 있다. 이에 비해 수출촉진산업화 정책은 무역과 외환 거래와 가격(환율) 결정에 대한 규제 철폐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과거 대개의 경제학자는 단순화된 모형 안에서 후진국은 1차 산업 생산물을 선진국에 수출하고 선진국은 후진국에 공산품을 수출하는 것으로 보고 이 산업들에 서로 비교우위가 있다고 봤고 자유시장에서 바로 이런 구조가 나타날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수입대체산업화 정책은 이런 구조에서 벗어나 공업화를 통해 기존에 수입해오던 공산품들을 직접 생산하고자 한 정책이다.
대만 출신 미국 경제학자 치앙 교수는 이런 방식의 이해는 정확하지 않으며 대만처럼 인구가 밀집된 반면 비좁은 토지를 가진 국가의 비교우위는 노동집약적 공업일 수 있다고 봤다. 관치청산을 정부출연연구소에서 주장해 유명한 유정호 한국개발연구원(KDI) 정책대학원 교수는 실제로 이런 노동집약적 수출공업화 정책이 후발국에 비교우위가 있음을 이해하고 이런 정책을 추진하도록 대만에 권고한 치앙 교수를 높이 평가한다. 남미와 동아시아 국가의 부침은 이런 이해가 있느냐 혹은 이런 이해가 없더라도 이런 정책을 채택하게 됐느냐로 갈렸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