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산책] 史實과 事實
고려 말을 무대로 하는 사극이 인기를 끌고 있다. 그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비중 있는 한 등장인물의 카리스마 넘치는 캐릭터가 극 초반의 바람몰이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가 이인임이다. 그동안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인물이었고, 기존 역사 기록에서 대표적인 간신으로 묘사되고 있던 그였기에, 드라마로 인해 한 인물이 새롭게 태어났다고 할 만하다.

그에 관한 내용이 사실일까.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일각에서는 역사의 왜곡을 우려하지만, 기왕의 역사서 자체가 왜곡된 것일 수 있다. 역사는 어차피 승자의 기록이다. 붓을 쥔 사람의 시각에서 기술하게 마련이다. 우리는 그저 사관이 그나마 양심껏 남겨놓은 행간의 장치를 읽을 수 있으면 그만일 것이다.

맹자가 말했다. “‘서경’의 내용을 다 믿는다면, ‘서경’이 없느니만 못하다(盡信書 則不如無書).” 유가에서 존중하는 경서의 내용조차도 다 믿을 수는 없다고 하니, 역사서야 말할 것도 없다.

사실 왕조 말의 역사서를 읽다 보면 정말 형편없는 인간상을 종종 만난다. 그래도 명색이 어렸을 때부터 최고의 스승들에게서 제왕학을 배운 한 나라의 임금이었고, 뛰어난 수재들, 지략가들과의 경쟁 속에서 살아남은 엘리트들이었는데, 정말 그런 한심한 짓을 했을까 의심이 들기도 한다.

성호 이익도 이런 기록을 다 믿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한다. 악인이라는 것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려다 보니, 사실을 왜곡하거나 사소한 비행을 과장해 기술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의 제자인 순암 안정복 역시 비슷한 취지로 ‘사서불가신(史書不可信)’이라는 글을 남긴 것을 보면 무리한 추측은 아닌 듯하다.

전통적으로 순(順)은 길한 것이고, 역(逆)은 흉한 것으로 여겼다. 그런 시대에 권력 주체의 변화는 곧 역(逆)이다. 자신이 차지한 권력이 정당하다는 명분을 얻기 위해서는 기존의 것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역사서를 읽을 때는 비판적 안목이 필요하다. 특히 정권이 바뀌거나 왕조가 바뀌는 즈음의 인물들에 대한 묘사는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정권의 경우 더러 재집권을 하면 조선조의 ‘실록’과 ‘수정실록’의 경우처럼 자신들의 입장을 충실히 변명할 여지나 있었지만, 왕조가 망하면 변명의 여지가 없이 그대로 사실이 돼 버린다.

봄꽃에 마음이 한껏 너그러워졌을 때다. 역사책 한 권 잡고서, 억울할 수도 있는 역사 속의 인물들에게 따뜻한 눈길을 한 번 주어보는 것은 어떨까.

권경열 <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사업본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