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수푸 지리홀딩스 회장, 수완 좋은 관광지 사진사…유럽 명차 볼보 삼키고 글로벌 자동차 王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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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마을 농부의 아들
고교 졸업하자마자 생업전선…종잣돈 100위안으로 사업
中기업 최초로 국제모터쇼 진출
냉장고 부품 제조 사업 대박…모터사이클·車로 영역 확장
수년간 준비 볼보 18억弗에 인수
'더 나은 미래' 새로운 꿈
볼보 품고 지리 실적 순항…기부 활동도 적극적으로
"가장 안전한 친환경 車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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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안전한 친환경 車 꿈"
단돈 100위안(약 1만6000원)을 밑천 삼아 30여년 만에 280억위안(약 4조7000억원)의 매출을 올린 중국의 거부. 틈이 날 때면 시(詩)를 쓰는 최고경영자(CEO). 사업 확장에는 동물적인 감각을 지녔으면서도 인류의 환경을 걱정하는 로맨티스트….
중국의 ‘헨리 포드(미국의 자동차 왕)’로 불리는 리수푸(李書福·51) 지리(吉利·Geely)홀딩스 회장 얘기다. 그는 2010년 포드사로부터 볼보를 인수, 일약 글로벌 자동차업계의 거물로 떠올랐다. ‘새우가 고래를 삼켰다’는 세간의 의혹을 불식시키듯 지리는 지난달 전년 대비 31% 뛴 순익 등의 실적을 발표했다.
순발력과 수완 뛰어난 청년 사업가
둥글둥글한 얼굴의 리 회장은 실제로도 잘 웃는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7일 파이낸셜타임스(FT)는 브뤼셀의 한 호텔에서 그를 만난 뒤 한 면에 걸친 기사를 게재하면서 ‘guffaws(깔깔대며 웃다)’ ‘jovial(명랑한)’ ‘chuckles(킬킬거리는 웃음)’ 등의 단어를 자주 인용했다. 인터뷰의 분위기가 어땠는지를 실감케 한다. 그가 시종 미소를 띠며 회고한 그의 사업 초기의 무용담은 이렇다.
17세 때 부친으로부터 고등학교 졸업 선물로 받은 100위안이 사업의 종잣돈이었다. 이 돈으로 그는 싸구려 카메라를 구입한 뒤 관광객을 상대로 사진을 찍으면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사업 전선에 뛰어든 이유는 가난 탓이었다. 리수푸가 태어난 때는 1963년. 저장성 타이저우의 산자락 마을이었다. 궁핍한 생활은 오히려 리수푸의 진취적인 성향과 부지런한 성격의 밑거름이 됐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가난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큰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진사로 활동하면서 그는 필름 현상약품 용액과 버려진 기계장치에서 금과 은을 추출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이때부터 금은 거래에 나서면서 돈을 벌어들였다. 종잣돈을 불린 그는 23세 때인 1986년 당시 가전제품 산업의 활황세를 틈타 냉장고 부품(증발기) 사업에 뛰어든다. 여기서 크게 성공한 그는 1993년 모터사이클 공장을 인수, 중국에서 처음으로 ‘4사이클’ 스쿠터 엔진을 개발하는 성과를 거뒀다. 잠시 사업을 접고 옌산대학에 들어갔을 때에도 기숙사를 짓는 건설현장을 목격하곤 곧바로 자재생산업을 시작했다. 이는 지금도 그에게 상당한 수익을 안겨주고 있다.
FT는 그런 리수푸를 가리켜 “재빠른 사업 아이디어 채택, 다양한 모방, 새 영토의 진입 등의 특징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리수푸 자신도 이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인은 빠른 학습자이자, 빠른 추종자들”이라고 강조했다.
볼보 인수한 자동차 업계의 거물로
승승장구하던 그는 1994년 부도 위기에 빠진 국유기업 지리를 인수해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면서 결정적인 도약기를 맞게 된다. 자동차 생산은 그러나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1998년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행운의 날인 8월8일 첫 생산제품을 출시했지만 문제는 품질이었다. 리 회장은 결국 판매를 포기하고 전량을 폐기 처분하기로 결정했다. 두 번째 생산 제품도 역시 폐기했다. 여러 차례 시행착오 끝에 2002년 한국의 대우차 모델을 기반으로 한 ‘프리 크루저(Free Cruiser)’라는 제품을 내놓았다. 이는 국제 모터쇼에 출품한 중국의 첫 번째 자동차이기도 하다.
서서히 전국 단위의 자동차 생산 기반을 확장해 나갔지만, 아직 자동차 사업으로는 확실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이 무렵, 그는 엉뚱하게도 당시 포드 자동차 소유의 볼보 브랜드 인수를 꿈꾸기 시작한다. 이 같은 결심에 대해 그는 ‘직감’이 작용했다고 말한다. 그는 “포드가 갖고 있는 모든 브랜드가 어떤 시점에 시장에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다”며 “그리고 볼보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브랜드였다”고 FT를 통해 회고했다.
리 회장의 꿈은 8년 뒤인 2010년 끝내 현실화된다. 18억달러(약 1조9000억원)에 볼보 경영권을 인수한 것. 준비과정은 치밀했다. 그는 법률자문사(프레시필드)를 비롯해 금융자문사(에드몽 드 로스차일드 은행), 재정컨설팅사(딜로이트)를 고용해 인수 프로젝트에 만전을 기했다. 미디어 홍보기업(브런즈윅 그룹)과도 계약을 맺어 볼보 인수에 대한 시장의 우려를 불식시키는 주도면밀함을 보였다.
볼보의 성공 가능성은 아직은 물음표다. 시장에선 볼보가 인수될 당시의 매출이 지리의 20배가 넘는 ‘공룡’이었다는 점을 들어 의구심을 거두지 않고 있다. 독일의 한 경영자는 FT를 통해 “볼보는 BMW, 아우디, 메르세데스와 같은 리그가 아니다. 중국의 자동차 제조업체들이 볼보를 호전시킬 수 있을지 궁금하다”고 지적했다. 리수푸는 “볼보와 지리가 결합됨으로써 경쟁력이 증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인류애 강조하는 따뜻한 CEO
자작시를 자신의 웹사이트에 올리길 좋아하는 취미에서 엿볼 수 있듯, 그는 사회적 이슈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가 최근 몇 년간 교육센터, 사회공공복지 기금으로 내놓은 돈은 1억위안(약 170억원)에 이른다. 2008년 원촨 지진이 발생했을 때도 지리는 1000만위안(약 17억원)을 기부했다. 그는 외신 기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미래를 위한 새로운 비전은 전체 인류에 기반한 것이어야 한다고 역설하곤 한다. 지구의 자원은 점점 고갈되고 있으며,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자동차 산업에 대한 나름의 신념도 확고하다. 2011년 그는 새해 연설에서 “내 꿈은 평범한 사람들이 탈 수 있는 자동차를 생산하는 것으로부터 가장 안전하고 환경친화적인 에너지 절감 차를 제조하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볼보의 경영철학에 대해서도 “볼보는 내 자신에게만 속하는 기업이 아니다. 모든 인류에게 속하는 기업이다. 나는 단지 볼보를 대신해 경영할 뿐”이라고 강조했다.
이정선 기자 sunee@hankyung.com
중국의 ‘헨리 포드(미국의 자동차 왕)’로 불리는 리수푸(李書福·51) 지리(吉利·Geely)홀딩스 회장 얘기다. 그는 2010년 포드사로부터 볼보를 인수, 일약 글로벌 자동차업계의 거물로 떠올랐다. ‘새우가 고래를 삼켰다’는 세간의 의혹을 불식시키듯 지리는 지난달 전년 대비 31% 뛴 순익 등의 실적을 발표했다.
순발력과 수완 뛰어난 청년 사업가
둥글둥글한 얼굴의 리 회장은 실제로도 잘 웃는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7일 파이낸셜타임스(FT)는 브뤼셀의 한 호텔에서 그를 만난 뒤 한 면에 걸친 기사를 게재하면서 ‘guffaws(깔깔대며 웃다)’ ‘jovial(명랑한)’ ‘chuckles(킬킬거리는 웃음)’ 등의 단어를 자주 인용했다. 인터뷰의 분위기가 어땠는지를 실감케 한다. 그가 시종 미소를 띠며 회고한 그의 사업 초기의 무용담은 이렇다.
17세 때 부친으로부터 고등학교 졸업 선물로 받은 100위안이 사업의 종잣돈이었다. 이 돈으로 그는 싸구려 카메라를 구입한 뒤 관광객을 상대로 사진을 찍으면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사업 전선에 뛰어든 이유는 가난 탓이었다. 리수푸가 태어난 때는 1963년. 저장성 타이저우의 산자락 마을이었다. 궁핍한 생활은 오히려 리수푸의 진취적인 성향과 부지런한 성격의 밑거름이 됐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가난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큰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진사로 활동하면서 그는 필름 현상약품 용액과 버려진 기계장치에서 금과 은을 추출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이때부터 금은 거래에 나서면서 돈을 벌어들였다. 종잣돈을 불린 그는 23세 때인 1986년 당시 가전제품 산업의 활황세를 틈타 냉장고 부품(증발기) 사업에 뛰어든다. 여기서 크게 성공한 그는 1993년 모터사이클 공장을 인수, 중국에서 처음으로 ‘4사이클’ 스쿠터 엔진을 개발하는 성과를 거뒀다. 잠시 사업을 접고 옌산대학에 들어갔을 때에도 기숙사를 짓는 건설현장을 목격하곤 곧바로 자재생산업을 시작했다. 이는 지금도 그에게 상당한 수익을 안겨주고 있다.
FT는 그런 리수푸를 가리켜 “재빠른 사업 아이디어 채택, 다양한 모방, 새 영토의 진입 등의 특징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리수푸 자신도 이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인은 빠른 학습자이자, 빠른 추종자들”이라고 강조했다.
볼보 인수한 자동차 업계의 거물로
승승장구하던 그는 1994년 부도 위기에 빠진 국유기업 지리를 인수해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면서 결정적인 도약기를 맞게 된다. 자동차 생산은 그러나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1998년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행운의 날인 8월8일 첫 생산제품을 출시했지만 문제는 품질이었다. 리 회장은 결국 판매를 포기하고 전량을 폐기 처분하기로 결정했다. 두 번째 생산 제품도 역시 폐기했다. 여러 차례 시행착오 끝에 2002년 한국의 대우차 모델을 기반으로 한 ‘프리 크루저(Free Cruiser)’라는 제품을 내놓았다. 이는 국제 모터쇼에 출품한 중국의 첫 번째 자동차이기도 하다.
서서히 전국 단위의 자동차 생산 기반을 확장해 나갔지만, 아직 자동차 사업으로는 확실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이 무렵, 그는 엉뚱하게도 당시 포드 자동차 소유의 볼보 브랜드 인수를 꿈꾸기 시작한다. 이 같은 결심에 대해 그는 ‘직감’이 작용했다고 말한다. 그는 “포드가 갖고 있는 모든 브랜드가 어떤 시점에 시장에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다”며 “그리고 볼보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브랜드였다”고 FT를 통해 회고했다.
리 회장의 꿈은 8년 뒤인 2010년 끝내 현실화된다. 18억달러(약 1조9000억원)에 볼보 경영권을 인수한 것. 준비과정은 치밀했다. 그는 법률자문사(프레시필드)를 비롯해 금융자문사(에드몽 드 로스차일드 은행), 재정컨설팅사(딜로이트)를 고용해 인수 프로젝트에 만전을 기했다. 미디어 홍보기업(브런즈윅 그룹)과도 계약을 맺어 볼보 인수에 대한 시장의 우려를 불식시키는 주도면밀함을 보였다.
볼보의 성공 가능성은 아직은 물음표다. 시장에선 볼보가 인수될 당시의 매출이 지리의 20배가 넘는 ‘공룡’이었다는 점을 들어 의구심을 거두지 않고 있다. 독일의 한 경영자는 FT를 통해 “볼보는 BMW, 아우디, 메르세데스와 같은 리그가 아니다. 중국의 자동차 제조업체들이 볼보를 호전시킬 수 있을지 궁금하다”고 지적했다. 리수푸는 “볼보와 지리가 결합됨으로써 경쟁력이 증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인류애 강조하는 따뜻한 CEO
자작시를 자신의 웹사이트에 올리길 좋아하는 취미에서 엿볼 수 있듯, 그는 사회적 이슈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가 최근 몇 년간 교육센터, 사회공공복지 기금으로 내놓은 돈은 1억위안(약 170억원)에 이른다. 2008년 원촨 지진이 발생했을 때도 지리는 1000만위안(약 17억원)을 기부했다. 그는 외신 기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미래를 위한 새로운 비전은 전체 인류에 기반한 것이어야 한다고 역설하곤 한다. 지구의 자원은 점점 고갈되고 있으며,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자동차 산업에 대한 나름의 신념도 확고하다. 2011년 그는 새해 연설에서 “내 꿈은 평범한 사람들이 탈 수 있는 자동차를 생산하는 것으로부터 가장 안전하고 환경친화적인 에너지 절감 차를 제조하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볼보의 경영철학에 대해서도 “볼보는 내 자신에게만 속하는 기업이 아니다. 모든 인류에게 속하는 기업이다. 나는 단지 볼보를 대신해 경영할 뿐”이라고 강조했다.
이정선 기자 sun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