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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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산 농산물과 제품이 쏟아져 들어오니까 우리나라 농민과 기업들이 힘들어 합니다. 가뜩이나 경제가 어려운데, 외국산 제품까지 들어와 경쟁하면 농민과 기업 모두 망합니다. 그런 일이 생기기 전에 외국산 농산물과 제품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합니다. 관세장벽을 높이 쌓아 올리는 것이 우리나라 농민과 기업을 보호하고 일자리를 지키는 애국하는 길입니다.”

1929년 10월24일. 미국 뉴욕 월가(街)의 뉴욕주식거래소에서 주가가 대폭락하며 시작된 대공황은 공장의 줄도산과 1500만명에 달하는 대량의 실업자를 만들었다.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유랑민이 속출했다. 이런 상황에서 보호무역을 통해 자국의 농민과 기업, 그리고 일자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잡기에 충분했다.

보호무역이 일자리 지킨다?…공황 악화시킨 '경제적으로 멍청한 법'
이런 주장을 하면서 관세를 높이자는 법안을 만든 사람들은 미국 상원의 세입위원회 위원장 리드 스무트와 하원의 세입세출위원회 위원장인 윌리스 할리라는 두 공화당 의원이었다. 이들은 수입품에 대해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자는 법안(The Tariff Act of 1930)과 후에 이른바 스무트-할리 관세법이 되는 법안들을 1929년 봄 의회에 제출했다. 이 법의 목적은 ‘정부 수입을 늘리고, 외국과의 통상을 규제하며, 미국의 산업을 장려하고, 미국의 일자리를 보호하는 등의 목적을 위한 법’이라는 긴 이름이 잘 나타내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 법의 목적도 매우 좋아 보인다. 이 법이 장차 전 세계를 대공황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지는 당시에는 잘 몰랐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장미꽃으로 치장돼 있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는 법이 바로 이 스무트-할리 관세법이다.

경제를 질곡으로 빠뜨리거나 경제의 발목을 잡는 이상한 법은 대부분 선거를 앞두고 그 전조를 보인다. 한국에서 지난 대선을 앞두고 경제민주화 논란이 일었고, 그 이후 국회에서 수많은 경제민주화 법안이 통과된 것도 그런 사례 중 하나다. 1928년 대통령 선거 캠페인이 한창일 때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후버가 내세운 공약 중 하나가 농산물에 대한 관세를 높여 어려움에 처한 농민들을 보호하겠다는 것이었다. 선거에서 승리한 후버 대통령은 농산물에 대한 관세를 올리는 대신 공산품에 대한 관세를 내릴 것을 의회에 요청했다.

하지만 이런 요구는 곧 수많은 공산품 제조업자의 저항에 부딪혔다. 결국 하원은 1929년 5월 농산물은 물론 공산품에 대한 관세까지 함께 올려버리는 내용의 법안을 찬성 264 대 반대 147로 통과시켰다. 244명의 공화당 하원의원에 20명의 민주당 하원의원이 동참한 것이다. 상원은 상원 나름대로 1930년 3월까지 자신의 법안을 놓고 격론을 벌이다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찬성 44 대 반대 42로 통과됐다. 공화당 의원 39명에 5명의 민주당 의원이 가세한 덕분이었다. 야당인 민주당에서 이탈표가 많았다는 것은 그만큼 이 법안이 국민들의 인기를 끌 수 있는 내용이었다는 방증이다.

상하 양원에서 통과된 각각의 법안은 상하 양원합동위원회에서 절충을 거쳤는데, 하원에서 통과된 법안의 내용이 주축이 됐다. 즉 수입되는 농산물과 공산품 모두에 대해 관세를 대폭 인상하는 내용의 법안이 찬성 222 대 반대 153으로 통과됐다. 찬성한 의원들은 공화당 의원 208명, 민주당 의원 14명이었다.

보호무역이 일자리 지킨다?…공황 악화시킨 '경제적으로 멍청한 법'
의회에서 스무트-할리 관세법안이 통과되자 폴 더글러스와 어빙 피셔 등 미국의 경제학자 1028명이 이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할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후버 대통령에게 제출한다. 자동차 왕인 헨리 포드는 이 법안을 ‘경제적으로 멍청한 법’이라고 칭하면서 백악관에서 후버 대통령을 만나 거부권을 행사하도록 설득했다. JP모간 회장인 토머스 라몬트도 거부권을 행사하라고 대통령을 설득하면서 거의 무릎까지 꿇었을 정도였다. 국제공조를 주장했던 후버 대통령의 입장에서도 이 법은 ‘사악하고 터무니없고 불쾌한 법’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여당인 공화당을 비롯한 정치인과 제조업자들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1930년 6월17일 법안에 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법으로 인해 2만개가 넘는 수입품에 대해 최고 400%에 달하는 관세가 부과됐다. 미국으로의 수출길이 막힌 다른 나라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들 국가 역시 보복관세를 부과했다. 전 세계가 보복관세 전쟁에 돌입한 것이다.

보호무역이 일자리 지킨다?…공황 악화시킨 '경제적으로 멍청한 법'
그 결과는 참혹했다. 1929년 44억달러였던 미국의 수입은 1933년 15억달러로 66%나 감소했다. 수출도 54억달러에서 21억달러로 61% 줄었다. 같은 기간 동안 국내총생산(GDP)은 50%나 감소했다. 미국 정부의 통계에 따르면 1929년 13억3400만달러였던 유럽에서의 수입은 1932년 3억9000만달러로 주저앉았고, 유럽으로의 수출은 1929년 23억4100만달러에서 1932년 7억8400만달러로 줄어들었다. 1929년부터 1934년까지 세계 무역은 66%나 줄어들었다. 스무트-할리 관세법안이 의회에서 통과될 당시인 1930년 7.8%였던 실업률은 1931년 16.3%, 1932년 24.9%, 1933년 25.1%로 치솟았다. 스무트-할리 관세법이 대공황을 직접 유발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1929년 말부터 시작된 불황을 대공황으로 전환시켰다. 이후 이 대공황을 심화시키고 장기화하게 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근로자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자국은 물론 세계 경제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법안의 입안자들, 즉 스무트 상원의원과 할리 하원의원을 유권자는 절대 잊지 않았다. 1932년 선거에서 그들은 참패했고 이후 정치권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하지만 이들의 후예들은 여전히 살아 있다. 특정 산업 부문이 어려움에 처하거나 경기가 후퇴할 때면 보호무역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이들이 바로 스무트와 할리의 후예다.

권혁철 < 자유경제원 전략실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