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수가 된 ‘붙들이’
대학교수가 된 ‘붙들이’
한국이 경제개발 정책을 본격 시행하기 시작한 1960년대는 한 푼의 외화가 아쉬운 시절이었다. 산업이 충분히 발전하지 않아 국민 태반이 실업자였다. 반면 독일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경제 성장을 이룩하고 있었고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노동력은 부족했다. 특히 간병인처럼 고된 육체노동이 요구되는 간호 인력과 어두운 갱도에서 일을 해야하는 광부 부족은 매우 심각한 상태였다.

두 정부의 이해관계는 일치했다. 한국 정부는 독일로 노동자들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파독 광부는 500명 모집에 4만6000여명이 지원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3년 계약의 광부는 매월 10만원 이상의 높은 수입이 보장됐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 공무원 월급은 4000~5000원(→말순의 남편이 독일로 떠난 까닭)이었다. 말순의 남편도 결혼한 지 1년도 안 돼 뱃속의 붙들이와 말순만 남기고 독일로 떠난다. 하지만 대부분 미숙련 근로자들이었기 때문에 크고 작은 부상과 후유증에 시달렸다. 말순의 남편처럼 죽는 사람도 적지않았다.

1963년부터 1976년까지 파독된 광부와 간호사는 총 1만8993명(광부 7936명, 간호사 1만1057명). 이들은 독일차관 1억5000만마르크(약 450억원)의 담보이기도 했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한국에 송금한 금액은 무려 1억1530만달러다. 당시 우리 수출액의 2%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이 금싸라기같은 돈이 척박했던 산업을 일으키는 개발자금으로 투입돼 경제 발전의 자양분이 됐다. 최근 12월21일을 ‘파독광부·간호사의 날’로 제정해 머나먼 이국땅에서 청춘을 바친 어르신들의 노고를 기려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