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발람-신이 축복한 땅
언덕 위에서 내려다본 코발람 해변의 전경은 아득하다. 1000여개의 어선들이 빼곡하게 도열해 있는데 모래사장과 바다, 하늘이 만나는 꼭짓점까지 배들의 행렬은 끝이 없다. 케랄라주에서도 남쪽 제일의 해변 휴양지로 손꼽히는 코발람은 인도인들에게는 ‘신이 축복한 땅’으로 불린다.
초승달처럼 아련한 해변의 코발람은 30여년 전만해도 히피들의 아지트였다. 코코넛 술 토디에 취해 적당하게 기분이 오른 히피들은 바닷가에서 낭만을 즐겼다. 이곳 코발람에서 인도의 남쪽 땅끝마을인 칸야쿠마리까지는 차로 불과 한 시간 거리. 인도양과 아라비아해가 만나는 성스러운 땅에서 해와 달이 뜨는 모습을 지켜본 이방인들은 코발람 해변으로 돌아와 석양의 바람에 취했다.
그 자유로운 땅에 최근에는 고급 리조트들이 차곡차곡 들어서고 있다. 코발람이 유럽인들에게 인기를 끄는 것은 자연친화적인 체험과 아유르베다 마사지 때문이다. 소마테람·마날테람 리조트 등은 몸을 치유하는 아유르베다 마사지를 테마로 한 리조트들이다. 이곳 리조트의 숙소에는 에어컨도 TV도 냉장고도 없다. 잠금장치는 전통 자물쇠다.
리조트 마당 가득히 허브 식물들이 심어져 있고 식단은 대부분 채식으로 꾸며진다. 아침에 일어나면 요가를 배우고 허브향 나는 마당에서 낮잠을 즐긴 뒤 저녁이면 온몸에 기름을 듬뿍 바르는 아유르베다 마사지에 몸을 맡긴다. 유러피언들은 그렇게 몇 주일을 머물다 가곤 한다.
코발람에서 케랄라의 주도인 인근 트리밴드럼으로 나서면 도시의 번잡한 풍경들과도 조우한다. 30m 높이의 흰 고푸람(힌두교 탑)이 인상적인 스리 파드마나바스와미 사원은 남인도 왕조의 후손들에 의해 400년간 관리되고 있다.
외지인의 입장은 엄격히 통제된다. 사원 앞 전통시장에서는 ‘맛살라’라는 향료가게들이 눈길을 끈다. 무더운 날씨 속에 사는 남부 인도인들에게 향신료는 없어서는 안 될 귀한 존재다.
콜람 수로 위 하우스보트
케랄라주 수로의 중심도시인 콜람에서의 휴식은 한결 이채롭다. 미로처럼 얽힌 수로에는 하우스보트로 통칭되는 풍뎅이 모양의 배들이 오간다. 이곳 사람들이 ‘케투발롬’이라고 부르는 하우스보트는 원래 물길을 오가던 쌀 수송선을 개조한 것인데 대나무로 지붕을 이어 우아한 멋을 더한다. 수십여m 길이의 보트에 올라서면 없는 게 없다. 수로 여객선의 최고급 결정판이다. 부엌과 거실, 방에는 에어컨도 갖춰져 있다. 배의 외관도 형형색색이어서 저마다 개성 넘치는 모습을 하고 있다.
배 위에서 하룻밤을 묵었다면 새벽녘 소리 없이 피어오르는 물안개와 나룻배의 움직임에 감동이 잔잔한 파문으로 밀려든다. 호수와 바다가 맞닿은 남인도는 자연풍광과 함께 외래문명이 묘하게 조화를 이룬 땅이다. 운하 북쪽에 있는 최대 도시 코친은 인도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항구로 기원전 3세기부터 향신료 무역의 중개지였다. 중국, 아라비아 배들이 끊임없이 드나들던 도시로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 열강의 각축지이기도 했다. 코친항에 중국식 어망이 남아 있는 것도, 인도에서 유일하게 유대인 마을이 보존돼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천년 세월의 중국식 어망과 마임극
코친항의 뒷골목은 유럽풍 거리다. 포르투갈의 항해왕 바스코 다 가마가 한때 묻혔다는 성 프란시스 성당은 그 용도가 몇 차례 바뀌었지만 무덤 터는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성당 뒤 길목에는 100년 역사의 레스토랑들이 나란히 늘어서 있다. 코친 항에서 남쪽으로 향하면 향신료 무역을 하던 유대인이 정착한 것으로 추정되는 유대인 마을과 마탄체리 궁전이 들어서 있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인의 손길이 닿은 마탄체리 궁전의 외관은 남루하지만 17세기에 제작된 내부 벽화는 수준급이다.
이국적인 풍경들로 채워진 남인도는 1000년 역사를 지닌 무용예술의 고장이기도 하다. 전통 마임극 카타칼리는 이야기 속 희로애락을 과격한 표정과 손짓으로 표현하며 남인도만의 개성 넘치는 무대를 보여준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무술로 알려진 ‘칼라리퍄야투’ 역시 쿵후의 한 장면을 만난듯 묘한 여운을 안겨준다. 남인도 길목에서 느끼는 단상은 사람들의 외관에서 확연히 구분된다. 인도 북부의 희고 훤칠한 아리안계가 아닌, 남부의 전형적인 짤막하고 검은 피부의 드라비다계다.
남자들이 입는 치마처럼 생긴 로티 역시 신분에 따라 다르다. 흰 옷인 ‘문두’는 중간 계급 이상의 남자들이 외출할 때 입으며 색깔 있는 ‘룬키’는 하층민들이 착용하는 옷이다. 계급과 피부 색깔의 차이에 상관없이 이들은 아침이면 ‘차이’를 마시며 일상생활의 평화를 함께 나눈다.
케랄라에서 느끼는 감동은 구식 슬라이드를 넘기다 숨막히는 광경들과 맞닥뜨리는 묘한 기분이다. 익숙한 풍경이 반복되다가도 우연히 스친 장면에 넋을 빼앗기곤 한다. 상상만했던 인도의 모습 또한 범상치 않은데, 또 다른 낯선 단면들에 가슴은 먹먹해진다.
케랄라=서영진 여행칼럼니스트 aularg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