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냉키 "6년 전 금융위기 때 밤잠 설쳐…사고 차 몰고 다리 건너는 심정"
“밤잠을 설쳤다. 자동차 충돌사고를 낸 뒤 고장난 차를 이끌고 다리를 조심스럽게 건너가는 심정이었다.”

벤 버냉키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사진)이 2008년 금융위기를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에 비유하면서 “다리를 무사히 건넌 후에야 ‘오 마이 갓’이란 말이 나오지 않느냐”고 회상했다.

이달 말 ‘세계 경제대통령’ 자리에서 퇴임하는 버냉키 의장이 16일(현지시간) ‘마지막 강연’을 했다. 워싱턴DC의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가 주최한 Fed 100주년 세미나에서다.

버냉키 의장은 한때 ‘중앙은행의 부처님’으로 불렸다. 금융위기가 절정이던 2008년 8~9월께 티머시 가이트너 재무장관이 그의 너무나도 침착하고 조용한 모습을 보며 이렇게 비유했다. 버냉키 의장은 이날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집중할 때 나타나는 나의 천성”이라며 “부처님처럼 사색하는 스타일은 아니다”며 웃었다.

그동안 버냉키 의장의 강연은 주로 준비된 원고를 읽고 그 다음에 패널토론 또는 짧은 Q&A가 뒤따르는 형식이었다. 이날은 달랐다. ‘금융의 제왕들(lords of finance·중앙은행 총재들을 지칭)’이란 책으로 퓰리처 상을 받은 금융역사학자 리아콰트 아메드가 질문하고 버냉키 의장이 답하는 방식이었다. 아메드는 책에서 1930년대 대공황은 Fed가 일으켰다고 주장했다. Fed의 성급한 금리인상이 화근이었다는 것. 사회자는 버냉키 의장을 소개하면서 “버냉키는 위키피디아에 이렇게 소개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대공황 전문가로 제2의 대공황을 일으켰다.’”(웃음)

버냉키 의장은 고별강연에서 그간 묻어둔 생각을 거리낌 없이 쏟아냈다. “Fed는 올바른 일을 했다. 미 경제는 결국 금융위기의 손실을 완전히 회복할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금융위기와 대공황 이래 최악의 경기침체에 대처하기 위해 사용한 비전통적인 통화정책, 즉 양적완화(채권 매입 프로그램)와 장기간의 제로금리 정책을 자평한 것이다.

그는 논란이 끊이지 않는 양적완화 부작용에 대해서도 “과장됐다”고 일축했다. “양적완화의 유일한 위험은 자산버블과 그로 인한 금융시장의 잠재적인 불안정성인데 지금은 그런 징후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현 시점에서 금융 안정성에 대한 우려로 경기부양적 통화정책을 중단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는 자산버블(거품) 우려와 관련해 “주가 수준을 시장가치 평가의 척도로 볼 때 대부분 역사적 범위 안에 있다”면서 “거품이 끼기 시작하면 Fed는 이를 막기 위해 금리인상보다 감독당국의 규제정책을 사용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양적완화가 인플레이션을 불러올 것이란 비판도 반박했다. 그는 지난해 12월 물가상승률(1.5%)이 Fed 목표치(2%) 아래에 머물고 있는 점을 거론하며 “인플레 리스크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Fed는 인플레를 잡을 수단을 많이 갖고 있다”고 자신했다.

버냉키 의장은 “정치권이 Fed의 양적완화를 비판하고 있지만 만약 Fed가 제때 대응하지 못해 경기가 더 침체됐더라면 포퓰리스트들의 비난은 더욱 거세질 것”이라고 비판했다.

워싱턴=장진모 특파원 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