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유례없는 불황을 겪은 출판계를 그나마 이끌어 갔던 건 한국 문학이었다. 조정래 작가의 《정글만리》가 지난해 유일한 밀리언셀러로 도약했고 정유정 씨의 《28》, 김영하 씨의 《살인자의 기억법》 등이 뒤를 이었다. 이 여세를 몰아 최근에도 한국 소설들이 연이어 출간됐다.

원래 연말연시는 신작이 잘 나오지 않는 비수기. 하지만 주목받는 신예 소설가 최진영 씨와 지난해 대산문학상을 수상한 김숨 씨, 중견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고종석 씨의 작품 등이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새해 초 독서 결심을 한국 소설로 시작하는 건 어떨까.

우선 2006년 실천문학 단편소설 부문 신인상을 수상한 최진영 씨의 세 번째 장편《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실천문학사)가 눈에 띈다. 주인공은 횡령과 탈세 그리고 과실치사 혐의로 여관방을 전전하는 도망자 원도.

밖에서는 노인들과 고아들을 위해 봉사하면서 집에서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화 한마디 나누지 않는 어머니와 “몇 대 맞을래”라는 질문으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강요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그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은 인간’으로 전락했다. 그는 ‘왜 사는가’가 아니라 ‘왜 죽지 않았는가’라고 스스로 묻는다. 그리고 그의 인생을 뒤틀어버린 단 한순간을 찾기 위해 기억을 거슬러 올라간다. 작가는 흡인력 있는 문장으로 독자들을 사로잡아 그의 내면에 가둬놓는다.

손꼽히는 문장가인 고종석 씨의 《플루트의 골짜기》(알마)도 추천할 만한 작품이다. 다섯 권으로 기획된 선집의 첫 번째 책이지만 ‘플루트의 골짜기’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우리 고장에선 그렇게 말하지 않아!’ 등 신작 단편소설이 세 편 실렸다.

특히 대한연방공화국으로부터 독립한 제주공화국이 2045년 한국어를 ‘공용어’에서 제외하고 외국어로 돌리는 개헌을 추진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은 ‘우리 고장에선…’의 설정은 흥미롭다. 인간과 사회의 단면을 내보이는 단편소설의 묘미와 신문기자·언어학자로서의 통찰을 동시에 맛볼 수 있는 소설집이다.

지난해 대산문학상을 수상한 김숨 씨의 네 번째 소설집 《국수》(창비)도 최근 출간됐다. 그가 이번 소설집에서 천착한 주제는 ‘가족’. 가족에 대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서술하며 그 의미를 독자들로 하여금 곱씹어보게 한다. 부부 간의 갈등과 균열을 사회적인 관점에서 그린 ‘막차’, 갈등을 딛고 화해를 이루는 계모와 딸의 심리를 국수를 만드는 조리 과정에 빗대 전달하는 ‘국수’ 등 아홉 편의 작품이 실렸다.

이 밖에도 대학 동창의 죽음을 전해 듣고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김, 최, 정의 기억을 로드무비 형식으로 풀어낸 이장욱 씨의 《천국보다 낯선》(민음사), 사랑의 상실과 치유, 한국사회에 정착하지 못한 이방인들의 삶을 동시에 담아낸 윤순례 씨의 《낙타의 뿔》(은행나무)도 읽어볼 만하다.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