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타분한 신파극 연상…와일드혼 음악도 '어정쩡'
남자를 유혹해 자신의 욕망을 채운 뒤 그를 파멸에 이르게 하는 여성을 ‘치명적인 매혹을 지닌 여성’이라는 의미로 ‘팜 파탈’이라 부른다. 프랑스 소설가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원작 ‘카르멘’에서 출발해 오페라 영화 연극 음악극 등 다양한 장르에서 형상화한 카르멘은 팜 파탈의 대명사다.

남자 주인공 돈 호세는 질투와 분노에 눈이 멀어 한 남자에 만족할 수 없는 카르멘을 살해한다. 카르멘에서 작품과 캐릭터의 핵심인 팜 파탈의 본성이 제거된다면 더 이상 카르멘이라 부를 수 있을까.

서울 LG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프랭크 와일드혼 작곡, 노먼 앨런 극본의 뮤지컬 ‘카르멘’은 원작에서 원초적인 생명력과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카르멘의 이미지만 빌려 왔다. 플라멩코와 거칠고 격렬한 몸싸움, 마술쇼, 서커스 공연, 애크로배틱 등 카르멘을 연상시키는 화려한 볼거리와 열정의 에너지가 무대에서 넘쳐난다. 기존 뮤지컬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시각적인 즐거움을 준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뮤지컬은 원작을 고리타분한 신파극으로 바꿔 놨다. 카르멘은 짐짓 악한 체하지만 알고 보니 더없이 착하고 순정적인 여인이었다. 고전을 장르의 특성에 맞게 대중성과 현대적인 감각을 살려 각색한 시도는 좋지만 작품의 주제와 본질까지 바꿔 놓으면 곤란하다. 여기에 내러티브까지 허술하다. 이야기 전개와 캐릭터 변화에 개연성이 떨어지고 설득력이 부족하다.

한국에서 유독 인기가 많은 와일드혼은 지난 9월 국내에 첫선을 보인 ‘보니 앤 클라이드’에 이어 ‘카르멘’에서도 작품 전체를 음악적으로 구성하고 설계하는 능력에 의심마저 들게 한다. 무엇보다 ‘뮤지컬 넘버’가 지나치게 많다. 고만고만하고 엇비슷한 강도와 톤의 노래들을 계속 듣다 보면 어느새 지친다. 강약 조절이 안 되다 보니 후반부 곡들의 음악적 감동이 떨어진다.

배우들의 열연이 그나마 ‘외화내빈(外華內貧)’의 헛헛함을 달래 준다. 바다는 카르멘 역을 맡아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낸다. 다만 전작인 ‘스칼렛 핌퍼넬’ ‘노트르담 드 파리’ 등에서도 그랬듯이 서정적인 곡을 마디마디 끊어 불러 듣는 이의 몰입을 주춤하게 하는 가창은 여전히 아쉬웠다. 공연은 내년 2월23일까지, 6만~13만원.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