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인물] 프레디 머큐리 "난 전설이 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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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문화의 가교 한경
“난 스타가 아닌 전설이 될 것이다.” 록밴드를 결성하며 이 같은 포부를 밝혔던 스물다섯 살의 청년은 10년도 안돼 자신의 말을 현실로 만들었다. 4옥타브를 넘나드는 가창력, 뛰어난 작곡실력, 열정적인 무대매너로 4억5000만여장의 앨범을 판 록그룹 ‘퀸’의 리드보컬 프레디 머큐리다.
1946년 영국 식민지였던 탄자니아 잔지바르 섬에서 태어난 그의 본명은 파로크 불사라였다. 인도인 아버지에 의해 인도로 보내져 뭄바이 기숙학교를 10년간 다녔다. ‘프레디’라는 별칭을 그때 얻었다. 영국 런던으로 이주한 그는 일링아트칼리지 그래픽디자인학과에 입학했지만 학창시절 내내 음악에 심취했다. 밴드를 결성했다가 해체하기를 수차례, 대학 졸업 2년 뒤인 1971년 평생을 함께할 친구들을 만났다. 브라이언 메이(기타), 로저 테일러(드럼), 존 디콘(베이스)과 함께 그룹 ‘퀸’을 결성했다.
1973년 3집 ‘킬러 퀸’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퀸의 인기는 급상승했다. 1975년 세계 최초 뮤직비디오와 함께 내놓은 ‘보헤미안 랩소디’는 9주 연속 영국 음악차트 1위를 차지했다. ‘섬보디 투 러브’ ‘위 윌 록 유’의 히트에 이어 ‘위 아 더 챔피언스’(1977)는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형 스포츠행사 결승전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해마다 새 앨범과 공연을 이어가던 퀸이 1989년 투어공연을 갑작스레 중단하며 머큐리의 투병설이 나돌았다. 그로부터 2년, 22년 전 오늘(1991년 11월23일) TV 화면에 머큐리가 등장했다. “나는 양성애자이며, 에이즈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충격적인 뉴스가 전해졌다. ‘록의 전설, 잠들다.’ 사인은 에이즈로 인한 폐렴. 45년간의 화려한 퍼포먼스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백승현 기자 argos@hankyung.com
1946년 영국 식민지였던 탄자니아 잔지바르 섬에서 태어난 그의 본명은 파로크 불사라였다. 인도인 아버지에 의해 인도로 보내져 뭄바이 기숙학교를 10년간 다녔다. ‘프레디’라는 별칭을 그때 얻었다. 영국 런던으로 이주한 그는 일링아트칼리지 그래픽디자인학과에 입학했지만 학창시절 내내 음악에 심취했다. 밴드를 결성했다가 해체하기를 수차례, 대학 졸업 2년 뒤인 1971년 평생을 함께할 친구들을 만났다. 브라이언 메이(기타), 로저 테일러(드럼), 존 디콘(베이스)과 함께 그룹 ‘퀸’을 결성했다.
1973년 3집 ‘킬러 퀸’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퀸의 인기는 급상승했다. 1975년 세계 최초 뮤직비디오와 함께 내놓은 ‘보헤미안 랩소디’는 9주 연속 영국 음악차트 1위를 차지했다. ‘섬보디 투 러브’ ‘위 윌 록 유’의 히트에 이어 ‘위 아 더 챔피언스’(1977)는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형 스포츠행사 결승전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해마다 새 앨범과 공연을 이어가던 퀸이 1989년 투어공연을 갑작스레 중단하며 머큐리의 투병설이 나돌았다. 그로부터 2년, 22년 전 오늘(1991년 11월23일) TV 화면에 머큐리가 등장했다. “나는 양성애자이며, 에이즈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충격적인 뉴스가 전해졌다. ‘록의 전설, 잠들다.’ 사인은 에이즈로 인한 폐렴. 45년간의 화려한 퍼포먼스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백승현 기자 arg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