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과 날줄] 추사에게서 배워야 할 것들
동물원이 포함된 대공원을 비롯해 현대미술관, 경마장이 들어서 있는 과천에 새로운 명소가 세워졌으니, 추사박물관이다. 2층에 추사의 생애가 펼쳐져 있어 제일 볼 만하다. 1층은 추사의 학예 교류와 추사체의 변화가 전시돼 있다. 지하에는 기획전시실과 후지쓰카 기증실 등이 들어서 있다. 한평생 추사의 글씨와 추사 관계 유물을 모은 후지쓰카 지카시는 1948년에 작고했고 그의 아들 아키나오가 아버지가 물려준 자료를 몽땅 기증한 것은 과천문화원장의 끈질긴 노력에 감격했기 때문이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이 맞다.

추사 김정희는 왜 말년에 과천에서 살았던 것일까. 추사는 55세부터 64세까지 9년 동안 제주도에 유배를 가 있었다. 당시의 당파싸움은 다른 파에 대한 모함으로까지 번지곤 했는데 역적으로 몰려 죽은 이가 추사의 이름을 대 꼼짝없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됐다. 추사를 아낀 우의정 조인영의 간곡한 상소문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건져 제주도로 귀양살이 가는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 같다.

유배를 끝내고 서울 용산에 있는 강변마을 강상(江上)에 2년 반을 살던 추사는 다른 일에 연루돼 함경도 북청으로 또다시 유배를 간다. 1년 뒤에 그는 서울로 오지 않고 과천에 가서 과지초당을 짓고 말년까지, 즉 67세부터 71세까지 과천에서 살다가 영면한다. 권력을 이용한 모함에 넌더리가 나 은거생활을 자청한 것이다. 판의금부사라는 벼슬을 했던 부친 김노경이 마련해둔 별장이 바로 과천에 있었다.

추사가 귀양길에 전주를 지나다 겪은 일이다. 그곳의 이름난 서예가 창암 이삼만이 글씨를 보여주며 평을 부탁했다. 추사보다 열여섯 살이 더 많은 71세의 노인이 글씨를 내밀었고, 그 자리에는 그의 제자들이 배석해 있었다. 추사 왈, “노인장께선 지방에서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라고 빈정댔다고 한다. 창암의 제자들이 추사를 패려고 하자 창암이 앞을 막으며 말린 후 그를 보내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 사람이 글씨는 잘 쓰는지 모르지만 조선붓의 헤지는 멋과 조선종이의 스미는 맛은 잘 모르는 것 같구나.” 그만큼 콧대가 높던 추사였다.

추사는 오랜 벗 초의선사를 만나고 가려고 해남 대둔사에 들른다. 대웅전의 현판 글씨 ‘大雄寶殿(대웅보전)’은 원교 이광사의 글씨였는데 속기가 있다고 여겨 일갈한다. “원교의 현판을 떼어 내리게! 글씨를 안다는 사람이 어떻게 저런 것을 걸고 있는가!” 추사는 지필묵을 가져오게 해 글씨를 써주고는 제주도로 떠나는 배가 있는 완도로 간다.

제주도에서의 위리안치 유배생활은 예상보다 훨씬 고달팠다. 제주도에서 그는 마음 깊이 반성한다. 인고의 세월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그림이 바로 ‘세한도’다. 그는 유배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대둔사에 들른다. 이광사의 글씨를 찾아 현판에 다시 올리고 상경하는 추사. 추사체가 유배생활을 안 했어도 완성될 수가 있었을까? 아니, 기교는 완숙해졌을지언정 정신의 깊이는 한참 못 미쳤을 것이다. 그는 그간의 오만한 자세를 버리고 자신을 응시한다. 그의 시서화는 9년의 유배생활 중에 완성됐다고 보아야 한다. 고난의 세월을 견디면서 생각과 글씨가 무르익었던 것이고, 그래서 자신만의 철학적 깊이를 지닐 수 있었던 것이다.

이근배 시인이 이 땅의 53명 시인이 ‘세한도’를 소재로 해서 쓴 시 65편을 모아 《시로 그린 세한도》를 펴냈다. 추사의 깊은 자기응시와 인고의 세월에 감동했기에 시인들이 너나없이 썼지 단지 유명한 인물의 그림이라고 해서 소재로 삼은 것이 아니리라. 과천문화원에서는 이 시집 외에도《완당전집》(3권),《추사 자료의 귀향》,《후지츠카의 추사연구자료》등 많은 책자를 발간했다.

추사가 말년에 벗 권돈인에게 쓴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다. “70평생에 벼루 10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 시련은 추사에게 큰 힘을 불어넣었고, ‘세한도’는 엄동설한을 맨몸으로 꿋꿋이 이겨내는 소나무의 인내심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이승하 시인·중앙대 교수 shpoem@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