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텐트 소재로 옷장 등을 만들어 연간 7000만달러어치를 수출하는 중견기업 A사. 이 회사는 최근 세무당국으로부터 16억원을 추징당했다. 베트남 공장에 임가공비를 과다 지급하는 방식으로 법인세를 탈루했다는 게 추징 사유였다. 김모 사장은 “성실하게 세금을 내 지난해 모범 납세자로 뽑혔는데 갑자기 세금을 추징당했다”며 “너무 억울해 국내 법인을 아예 청산하는 것도 검토 중”이라고 하소연했다.

#2. “칼을 들이대는데 누가 지갑을 열겠어요.” 10대그룹 한 계열사 사장의 말이다. 대통령이 기업 투자를 진작시킬 방안을 추진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지 1주일도 안 돼 롯데쇼핑이 세무조사를 받은 상황을 두고 한 발언이다. 그는 “대통령의 말과 정부 부처의 행동이 서로 다르지 않느냐”며 “국세청 등 사정당국이 기업을 옥죄는데 어떤 기업이 투자하려 하겠느냐”고 꼬집었다.

최근 경제민주화 속도 조절과 기업 투자 진작을 강조한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에 반색했던 기업 현장의 분위기가 다시 얼어붙고 있다. 대통령의 말과 정반대인 정부 부처들의 움직임 때문이다. 기업들 사이에선 “도대체 정부의 진심이 뭐냐” “한쪽에선 투자하라고 하고, 다른 쪽에선 칼을 들이댄다”는 볼멘소리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투자하면 업어주겠다는데…기업이 불안에 떨고 있는 까닭은

(1) 커지는 세무 리스크…GS·LG·SK·롯데그룹 계열사 세무조사

지난 10일과 11일 박 대통령의 발언이 전해진 직후 재계는 반색했다. “경제민주화 주요 법안이 거의 끝에 오지 않았나 생각한다”(10일 언론사 논설실장 간담회), “투자하는 분들은 업고 다녀야 한다”(11일 제2차 무역투자진흥회의)는 발언 때문이다. 정권 출범 이후 가장 강도가 ‘센’(?) 친기업 발언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1주일도 안 돼 바뀌었다. 국세청이 16일 롯데그룹 계열사인 롯데쇼핑에 대해 전격 세무조사에 착수하자 또다시 ‘사정 한파’가 불어닥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재계를 엄습했다.

무엇보다 롯데쇼핑을 계기로 세무당국의 칼날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올 들어 국세청 세무조사를 받은 기업은 30곳에 달한다. 10대그룹 중에선 롯데그룹 GS그룹 LG그룹 SK그룹 등의 계열사가 세무조사를 받았다.

세금을 추징당한 곳도 대기업 중견기업을 포함해 14곳이나 된다. 이 과정에서 온갖 세무조사 방식이 동원됐다. 국세청은 정기 세무조사와 특별 세무조사 외에 기업들의 과거 합병 과정까지 되짚어 세금을 추징하고 있다.

지난 3월에만 동부하이텍 오성엘에스티 등 5개 기업이 이런 식으로 총 945억원의 법인세를 부과받았다. 중소·중견기업도 예외는 아니다. 인도네시아에서 가발을 만드는 중견기업 B사도 A사와 같은 이유로 상당한 세금을 추징당했다. 넥센타이어도 지난 3일부터 세무조사를 받고 있다.

(2) 정부부처 존재감 과시 경쟁…공정위 직권조사만 14건 달해

국세청뿐만이 아니다. 다른 사정 부처들도 최근 들어 기업 조사 강도를 높이고 있다. 관세청은 5월 말 GS칼텍스 SK에너지 현대오일뱅크 등 정유사를 대상으로 기획심사를 벌였다.

이들 업체에 대해 수년간 관세 환급금을 부당하게 돌려받은 혐의를 적용해 수천억원의 추징금을 부과할 것으로 알려졌다.

관세청은 지난달엔 조세피난처와 외환거래 실적이 있는 중견 수출입기업 100여개를 대상으로 불법 외환거래 혐의도 조사하기 시작했다.

공정거래위원회도 전방위 기업 압박에 나섰다. 올해 공정위가 기업을 겨냥해 착수한 직권조사(담합 제외)는 알려진 것만 14건이다. NHN 다음 이노션 LG하우시스 등이 부당 내부거래 및 하도급 거래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관계자는 “중견기업으로 범위를 넓히면 14건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3) 경제팀 조정능력 부족

부처간 협업 떨어져…정책방향 혼선

문제는 사정부처들의 이 같은 움직임에 대한 컨트롤 타워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특히 박 대통령의 발언과 달리 사정부처들은 칼바람을 멈추지 않는 점이 기업들을 혼란스럽게 한다는 지적이 많다.

4대그룹 전략·기획담당 사장은 “박 대통령의 말만 들으면 기업들이 지금 투자를 해야 할 시점인 것 같은데, 드러나는 현상은 온통 기업 옥죄기”라며 “이런 상황에서 기업이 어떻게 투자 결정을 내리겠느냐”고 했다.

재계에선 새 정부 출범에 맞춰 힘 있는 사정부처들이 경쟁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데 기업을 이용한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는 “(부처들이) 기업을 옥죄는 규제를 만들고 대기업을 조져야 자신들에게 힘이 생기고 부처의 존재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며 “오죽하면 대통령이 부처 간 협업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겠느냐”고 꼬집었다.

또 다른 기업 CEO는 “대통령의 뜻을 각 부처에 분명히 전달하고, 수위 조절을 할 만한 컨트롤 타워가 없는 게 문제”라며 “총리나 부총리가 그런 역할을 해줘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은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이태명/정인설/김주완 기자 chihir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