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병하면서도 쉼 없이 붓질…약 먹은 듯 고통 줄어들어"
화려한 색과 선이 죽죽 뻗은 그림들. 어떤 작품은 비단결 색동저고리 형상 같고, 어떤 작품은 비둘기가 하늘을 나는 것 같다. 캔버스 위에 유화 물감을 두껍게 수백 번 넘게 칠한 색면추상화 45점이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 걸렸다.

내달 3일까지 이어지는 이 전시회는 신장병으로 투병하며 마치 약을 먹듯 그림을 그려온 재불화가 이종혁 씨(73)가 서울에서 13년 만에 여는 개인전이다.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한 그는 1963년 ‘프랑스 국비 유학생 1호’로 선발돼 파리 유학길에 올랐다. 에콜 데 보자르에서 조각을 공부한 후 파리 아카데미 드퓨에서 회화를 익혔다. 파리에서의 유학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굶는 것이 다반사였고, 마땅한 직업이 없어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1969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조각가로 참가한 그는 1970년부터 회화 작업으로 방향을 틀었다. 어느날 교회에 갔는데 유리창 사이로 들어오는 신비로운 ‘하얀 빛’에 매료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70년대 말에는 4차원적 시각 세계를 담은 ‘공간 속의 환상’ 시리즈로 주목받아 유럽 화단에 이름을 알렸다. ‘미술 한류’의 원조인 셈이다.

프랑스 화단에서 50여년을 활동한 이 화백은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안좋아 늘 병원신세를 졌다”며 “2년 전부터 병원에 누워 있었는데 죽을 것만 같았다”고 말했다.

“하루 한 번씩 투석하며 병원생활을 했습니다. 남은 시간에는 그림을 그렸지요. 고통에 대한 오기였는지도 몰라요. 서울 전시를 위해 퇴원한다는 말에 의사는 ‘나가면 죽는다’고 하더군요. 그렇지만 붓을 들고 있으면 마치 약을 먹는 것 같아요. 고통이 없어지고 살아있는 느낌이 들거든요.”

색면 분할로 펼쳐지는 그의 작품 세계는 환상적일 정도로 화려하면서도 신비한 맛을 낸다. 몇 조각으로 분할된 캔버스에는 세모 네모 형태가 많고 다면체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조각가 출신답게 3~4차원적 공간감을 강조한 것이다.

작품에 제목을 붙이지 않는 그는 “소설 쓰듯 그릴 수 있는 것이 추상”이라며 “내 그림 속에는 어렸을 때 뛰놀던 모습과 연애하던 여자 친구의 얼굴이 보인다”고 설명했다.

미술평론가들은 그의 작품을 ‘시적 추상화’라고 부른다. 일부에선 ‘보이는 색인 동시에 듣는 색’을 구사하는 작가라고 평한다. 프랑스 미술평론가 로제 부이오는 “이 화백은 빛살로 아롱지는 형상을 통해 음악적 효과를 나타내는 작가”라고 극찬했다.(02)734-0458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