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삐 풀린 엔화, 해외 채권시장 공습
해외 채권시장에 엔화가 몰리고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금융완화 정책(아베노믹스)이 원인이다. 잔뜩 불어난 엔화가 높은 수익률을 찾아 글로벌 시장으로 흘러들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 내 자금시장에도 불이 붙었다. 회사채 발행이 줄을 잇고, 주식시장에 신규 상장하는 기업도 늘었다. 아베노믹스로 인한 유동성 폭탄의 충격이 일파만파로 번져가는 양상이다.

◆‘엔화 엑소더스’ 시작

이번주 들어 10년 만기 프랑스 국채의 수익률은 사상 최저인 연 1.7%대로 하락(채권값은 상승)했다. 독일과 영국의 30년짜리 장기 국채금리도 각각 작년 7월과 8월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재정악화로 신음하고 있는 이탈리아와 스페인 10년물 국채 금리도 지난 주말에 비해 각각 0.11%포인트와 0.09%포인트 내렸다.

금리 하락은 그만큼 채권을 사려는 수요가 늘었다는 얘기다. 돈다발을 흔드는 쪽은 일본이다. 특히 일본 내 금융회사와 연기금 등이 다급하게 채권을 사모으는 중이다.

계기는 일본은행의 금융완화 정책이다. 구로다 하루히코 신임 일본은행 총재가 유동성 공급을 위해 국채 매입 규모를 대폭 늘리겠다고 선언하면서 엔화의 유럽행 엑소더스에 가속이 붙었다. 일본은행이 계획 중인 국채 매입 규모는 월간 7조엔가량. 매월 일본 시장에 공급되는 국채의 70% 수준이다. 일본 국채는 곧바로 금값이 됐다. 지난 주말에는 일본국채 10년물 금리가 연 0.3%대까지 하락했다.

일본 장기 국채금리의 하락은 일본 금융회사 및 연기금의 수익성 악화를 의미한다. 쥐꼬리만한 수익률로는 살림을 꾸리기 힘들다.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해외로 뛰쳐나갈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된 셈이다. 유럽과 함께 미국 국채시장이 뜨거워지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올초 연 3% 수준이던 30년 만기 미 국채 수익률은 최근 연 2.8% 수준으로 하락했다.

해외 금융 사업을 아예 통째로 사들이는 일본 기업도 늘고 있다. 미쓰비시UFJ은행은 최근 도이체방크의 미국 부동산 대출사업 부문을 3600억엔에 인수했고, 지난 2월엔 오릭스가 네덜란드 최대 상업은행인 라보은행의 계열사 로베코자산운용사를 2400억엔에 사들였다.

◆일본 자금시장도 들썩

그동안 풀이 죽었던 일본 회사채시장도 살아나는 분위기다. 설비투자 자금 등을 마련하기 위해 회사채를 새로 찍으려는 일본 기업이 줄을 잇고 있다. 금융완화로 시중에 자금이 풍부해진 데다 조달금리까지 낮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닛산자동차는 이달 중 5년짜리 회사채 1000억엔어치를 발행할 계획이다. 닛산의 회사채 발행은 2011년 4월(700억엔) 이후 2년 만이다. 일본 통신회사인 NTT도 1000억엔 규모의 10년 만기 회사채 발행을 준비 중이다. 이 밖에 긴키일본철도 오릭스 세븐앤드아이홀딩스 등도 이달 중 회사채 발행 대열에 동참한다.

엔저(低)로 주가가 오르면서 신규 상장기업도 늘어나는 추세다. 올 1분기 중 일본 증시에 상장한 기업은 총 13개로 전년 동기(7개)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늘었다. 1분기만 놓고 보면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다.

우려하는 시선도 없지 않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잉태했던 1980년대 말에도 늘어난 유동성을 주체하지 못한 일본 금융회사들이 해외 투자에 열을 올렸고, 일본 내 주식시장도 과열 양상을 띠었다는 지적이다. 아사히신문은 “일본은행의 양적완화 조치 이후 ‘자산 버블’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도쿄=안재석 특파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