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사람들은 역사와 함께 눈을 뜨고 신화의 세계에서 잠을 잔다. 도시 곳곳에 불탑과 왕릉, 천년 고찰이 이웃집 건물처럼 나란히 서 있는 곳. 누구나 한 번쯤은 수학여행이든 개별여행이든 다녀왔던 곳이 바로 경주다. 사람들은 경주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경주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진 곳이다. 8세기경 경주는 세계 역사의 중심에 섰던 메트로폴리스였다. 영토 크기가 아니라 문화의 넓이와 깊이가 당시를 살았던 제국에 뒤지지 않기 때문이다.

○경주에서 조선 정자에 오르다

흔히 경주 하면 첨성대나 불국사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기에 경주에 조선시대 양반 문화의 정수가 오롯하게 남아 있으리라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경주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양동마을과 성리학의 거두였던 회재 이언적 선생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정여찬 이황 등과 함께 ‘동방 5현’으로 꼽히던 회재 선생은 조선 중종 시절 성리학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양동마을에서 5㎞ 정도 떨어진 곳에 외따로 있는 회재 선생의 고택인 독락당(獨樂堂)은 한적하면서도 절제미와 화려함을 갖춘 보기 드문 건축물이다. 독락당은 회재 선생이 유배돼 살던 곳으로, 즐거움을 독차지하면 큰 재앙을 불러들일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과 나누면 참다운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유배지답게 회재 고택은 한적한 곳에 떨어져 있다. 회재 고택은 웅장하지는 않지만 아기자기하면서도 정갈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회재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 후손들이 세운 옥산서원은 영남지역에서 이름 높은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서원에는 당대 최고의 서예가였던 한석봉과 이산해의 현판이 붙어 있다. 추사가 쓴 편액과 퇴계의 글씨까지 남아 있으니 가히 조선 최고의 글쟁이와 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문무대왕의 애국혼과 흥덕왕의 사랑

경주의 바다를 대표하는 두 가지가 있다면 하나는 주상절리고 또 하나는 문무대왕 수중릉이다. 제주처럼 절벽이 깎아진 형태의 주상절리는 아니지만 바다 위에 누워 있는 부채꼴 형상의 주상절리는 독특한 감흥을 준다. 주상절리는 화산의 마그마가 화구에서 흘러나와 급격히 식을 때 부피가 줄면서 사이사이 틈이 생긴 것이다. 경주의 주상절리는 수직과 수평 방향의 절리를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어서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기 어렵다고 한다.

양북면의 문무대왕릉은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문무대왕의 애국혼이 살아있는 곳이다.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켜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뤘지만 문무왕은 늘 불안했다. 백제를 멸망시킬 때 연합전선을 펼친 당나라가 이번에는 신라를 복속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왕은 죽음의 순간까지도 나라의 안위를 걱정했다. 그는 자신의 능을 바다 속 바위로 정했다. 살아서는 백제와 고구려 땅을 누비며 전쟁을 치러 통일 대업을 이룬 왕이 하필이면 왜 양지바른 땅도 아닌 차가운 바다 속에 무덤을 정했을까. 죽어서도 백성들의 안위와 신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왕의 길을 걷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문무대왕이 강하고 남성적이라면 흥덕왕은 신라시대 가장 로맨틱한 왕이 아닐까 싶다. 해상왕 장보고가 활약하던 시절 나라를 통치했던 흥덕왕은 정사의 능력도 뛰어났지만 왕후와의 순정한 사랑을 지킨 왕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왕비 장화부인(章和夫人)을 지극히 사랑했던 나머지, 부인이 먼저 죽자 후처를 들이지 않고 평생 혼자 살았다.

흥덕왕은 10년간 짧게 재위하다 836년에 죽었는데 먼저 간 왕비의 능에 합장됐다. 이곳이 바로 안강읍에 있는 흥덕왕릉이다.

경주=최병일 여행·레저 전문기자 skycbi@hankyung.com

■ 여행팁

경주세계문화엑스포 문화센터에서 매주 화~일요일 펼쳐지는 ‘미소2:신국의 땅, 신라’는 내외국인이 모두 좋아하는 공연으로 손꼽힌다. 단순한 무용극이 아니라 삼국통일을 이루는 신라의 역사를 박진감 있게 보여준다. 공연은 1시간. 공연 후 출연 배우들과 포토타임도 가질 수 있다.

정동극장 경주문화사업부(054-740-3800). 보문단지 내 화산운수대통한우가든(054-736-6767)은 한우 맛이 뛰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밑반찬도 맛있고 후식으로 나오는 우거지 된장국도 훌륭하다. 안강 지역의 다슬기탕도 이름이 높다. 경상도에선 ‘고디탕’이라고 하는데 안강할매고디탕(054-762-0352)이 손꼽힌다. 잠자리는 힐튼호텔과 한화리조트, 블루원리조트 등이 있다. 힐튼호텔의 경우 비즈니스 고객에게, 한화리조트는 가족단위 휴양객에게, 블루원리조트는 골프 손님에게 인기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