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출 99억원, 영업손실 41억원. 일진그룹(회장 허진규)의 터치스크린(TSP) 전문 계열사 일진디스플레이(사장 심임수)의 2008년 성적표였다. 2003년 처음 영업손실을 내기 시작한 이래 6년 연속 ‘적자의 늪’에서 허우적댔다.

이랬던 회사가 지난해 641억원의 영업흑자를 내는 초우량 기업으로 탈바꿈했다. 매출도 급신장했다. 100억원이 채 안 되던 매출이 작년 약 6000억원으로 불었다. 심임수 전 삼성SDI 부사장이 최고경영자(CEO)로 부임한 뒤 일진디스플레이는 4년 만에 60배 성장했다.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다”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심임수 일진디스플레이 사장은 “기업이 지속 성장할 수 있는 조건 중 하나는 잘 나갔던 ‘왕년’을 잊는 것”이라며 “새롭게 시작하는 기분으로 ‘매출 1조원 클럽’을 향해 전진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미운 오리’에서 ‘백조’로

부품·소재 전문기업 일진그룹은 2008년 5월 통 큰 결단을 내렸다. 중소기업 에이터치를 인수하며 TSP 시장에 출사표를 던졌다. 그룹 차원에서 처음으로 정보기술(IT) 사업에 뛰어든 순간이었다. 그러나 시장 상황이 만만치 않았다. 후발주자였을 뿐 아니라 TSP의 기술 표준이 확립되지 않았던 게 더 큰 문제였다. 당시 TSP는 ‘저항막’과 ‘정전용량’ 등 두 가지 기술이 힘겨루기를 하던 때였다. 저항막은 압력으로, 정전용량은 전류 흐름으로 각각 터치를 인식하는 기술이다.

이듬해 3월 그룹이 조타수로 영입한 심 사장의 고민이 컸다. 에이터치가 주력으로 하는 저항막 방식을 고수할지, 새롭게 정전용량 방식에 투자할지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고민 끝에 투과율과 내구성이 좋고 멀티터치가 가능한 정전용량이 대세가 될 것이라고 판단, 신규 투자를 단행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삼성과 애플이 모두 정전용량 방식의 스마트폰을 내놓으면서 시장이 급성장했다.

덕분에 일진디스플레이 매출은 빠르게 늘었다. 2008년 99억원에서 2009년 338억원, 2010년 1139억원, 2011년 3244억원으로 해마다 약 3배씩 성장했다. 지난해에는 매출 5965억원, 영업이익 641억원을 각각 기록, 역대 최대 실적을 달성했다. 신사업인 터치스크린이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해 95%에 육박한다. 2008년만 해도 전체 매출에서 TSP 비중은 36.4%에 머물렀다. 태생은 발광다이오드(LED) 소재회사였지만 지금은 TSP 전문기업으로 자리를 굳혔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심 사장은 “LED 소재 사업이 꾸준한 가운데 TSP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지속 성장의 기반을 굳혔다”고 자평했다.

○‘일괄공정+선행관리=급성장’

한국에는 TSP 회사가 줄잡아 40여개에 달한다. 삼성과 애플 주도로 스마트폰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TSP 제조회사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그러나 시장 상황과 품목이 좋다고 모두가 똑같이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심 사장은 일진디스플레이가 단기간에 확 달라진 첫째 비결로 ‘일괄공정’을 꼽았다. 터치스크린 제조에 필요한 기초 소재인 센서부터 모듈까지 전 공정을 외주 없이 스스로 소화하는 게 최대 경쟁력이라는 얘기다. 그는 “경쟁사들은 일본과 대만에서 센서를 조달해 모듈만 만들지만, 일진은 전 공정을 자체적으로 다 한다”며 “개발 대응력이 빠르기 때문에 수명이 짧은 스마트폰 산업에 유리하고 원가 경쟁력도 좋아진다”고 설명했다.

시장 변화나 고객 요청을 미리 예상하는 선행관리 능력을 그 다음으로 들었다. 업계가 저항막 방식에 매달리고 있을 때 정전용량 방식에 먼저 투자함으로써 고객사의 요청이 오는 즉시 대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심 사장은 “개구리는 경칩에 딱 맞춰 나와야지, 너무 이르거나 늦게 나오면 안 된다”며 “사업은 타이밍이 중요하다. 너무 일찍 투자하면 손실이 커지고, 뒤쫓기만 하면 먹거리를 챙길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런 경쟁력에는 심 사장 개인의 경력이 크게 이바지했다는 평가다. 삼성SDI에서 모바일 관련 비즈니스를 30여년간 맡았던 게 스마트폰 산업의 생리를 이해하고 시장 상황을 예측하는 데 도움이 됐다는 평가가 일진그룹 안팎에서 나온다.

○“2015년 ‘매출 1조원 클럽’ 가입”

지난해 글로벌 스마트 기기 시장은 스마트폰이 성장을 주도했다. 올해는 태블릿PC가 바통을 넘겨받는다. 태블릿PC가 시장을 이끌고 스마트폰이 힘을 보태는 형국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국내 TSP 기업 가운데 태블릿PC에 가장 경쟁력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 일진디스플레이가 올해도 두 자릿수 성장을 자신하는 배경이다.

이 회사는 삼성전자가 세상에 처음 선보인 태블릿PC에 들어간 TSP를 만들었다. 업계는 삼성이 올해 약 4500만대의 태블릿PC를 내놓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작년보다 150% 많은 규모다. 덕분에 일진디스플레이는 올해 약 8000억원의 매출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증권업계는 예측하고 있다.

일진디스플레이는 올해 기술 차별화를 통해 다시 한번 경쟁사들의 추격을 따돌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TSP에 전극을 프린트하는 기존 방식 대신 빛을 활용해 전극을 형성하는 노광 공법을 준비하고 있다. 또 화면 테두리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베젤을 최소화해 디스플레이의 유효 화면을 극대화하는 기술도 선보이기로 했다. 오는 4월 준공하는 평택 본사 인근 제2공장에서는 두 가지 신기술로만 TSP를 제조할 계획이다.

심 사장은 “터치스크린은 기술 변화가 상당히 빨라 ‘졸면 죽는’ 업종”이라며 “경쟁사들이 센서를 자체 생산하는 식으로 뒤쫓고 있기 때문에 기술 격차를 벌리기 위해 새로운 기술을 선보일 채비를 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LED 소재 사업은 바닥을 다졌다고 했다. 그는 “지난해엔 350억원 매출에 이익도 좀 난 편”이라며 “LED 조명 시장 성장세 덕분에 올해 하반기부터는 훨씬 좋아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심 사장은 “당초 매출 1조원 클럽 가입 예상 시기를 2017년으로 잡았는데 매해 1년씩 줄어들고 있다”며 “2015년에는 매출 1조원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평택=김병근 기자 bk1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