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법률사무소를 운영하는 변호사 김모 씨는 최근 거래은행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가 이용 중인 연 6% 초반 금리의 전문직 신용대출을 중소기업 대출의 일종인 ‘개인사업자 대출’로 전환하면 금리를 연 5% 중반까지 낮춰주겠다는 것이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중소기업 육성 의지를 밝히자 시중은행장들이 연초부터 경쟁적으로 중소기업 현장을 찾고 있다. 겉으로는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것 같지만, 내용을 뜯어 보면 사정이 다르다. 자금 사정이 급박한 중소기업 대신 의사 변호사 등 고소득 자영업자들의 개인 대출을 사업자 대출로 전환하는 등의 방법으로 ‘중소기업 대출’을 늘리고 있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이다.

지난 1월 주요 은행의 중소기업 대출 잔액은 전달에 비해 증가했다. 하지만 이는 운전자금이 필요한 중소기업 대신 통계상 중소기업으로 분류되는 개인사업자에 대한 대출을 늘린 결과다. A은행은 개인사업자 대출이 12조9000여억원으로 전달에 비해 1600억원가량 늘어난 반면, 중소 법인 대출은 18조7000여억원으로 오히려 1600여억원 줄었다. B은행은 늘어난 중소기업 대출의 절반가량이 개인사업자 대출이었다.

이 같은 현상은 중소기업 대출을 늘리라는 금융당국의 압력이 거셌던 지난해부터 이어지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시중은행들은 지난해 중소기업에 총 29조4000억원을 빌려줬다. 2011년보다 2조4000억원 늘어난 규모다. 그런데 증가분 중 2조3000억원이 개인사업자 대출이었다.

은행들이 개인사업자 대출을 늘리는 것을 뭐랄 수는 없다. 개인사업자에는 자금 지원이 필요한 영세 자영업자도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사를 대상으로 한 ‘닥터론’이나 변호사 등이 대상인 ‘로이어론’을 중소기업 대출로 돌려 실적을 채우는 행태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중소기업 대출에는 부실 위험이 따른다. 꼼꼼한 심사를 통한 옥석 가리기 과정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이런 노력 없이 실적 채우기식의 영업 행태를 지속할 경우 은행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더 커질 것이다. 은행장들의 생색내기식 중소기업 현장 방문보다는 신용은 낮지만 성장 가능성이 큰 중소기업을 선별할 수 있는 심사 역량을 키우는 게 더 중요하다.

김일규 금융부 기자 black041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