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라인 스케이트 보조교사 황석일 성화 불붙여

“지적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규칙을 잘 지키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장애를 타고났다고 비관하지 않고 끝까지 도전할래요.”(황석일 평창 동계 스페셜올림픽 개막식 성화 점화자)

‘세계 지적장애인들의 축제’ 평창 동계 스페셜올림픽이 29일 강원 평창 용평돔에서 막을 올렸다. 개막식은 이번 대회에 스노보드와 쇼트트랙 두 종목에 참가하는 황석일 선수(24·사진)가 성화를 점화하는 순간 절정에 달했다. 그리스 아테네에서 채화돼 전국 2500㎞를 돌아온 성화를 들고 무대에 나타난 그는 큐빅을 밟고 성화대에 올라 희망과 꿈을 상징하는 성화를 밝혔다.

청주에서 인라인스케이트 보조교사로 일하는 그는 지적장애인 선수 중에서도 빼어난 기량과 풍부한 경험을 가졌다. 2009년 아이다호 동계대회, 2011년 아테네 하계대회에 이어 이번 스페셜올림픽이 세 번째 대회다. 아테네대회 때는 바다 수영 종목에서 완주하며 자원봉사자들의 열렬한 박수를 받았고, 아이다호대회에서는 스노보드 상급에서 금메달 2개, 은메달 1개를 땄다.

그도 운동을 시작하기 전엔 전형적인 자폐 증상을 보이면서 외부와 담을 쌓고 심각한 정서불안에 시달렸다. 인라인스케이트를 배우면서 집중력과 자신감이 크게 향상됐고 이제는 동·하계를 넘나드는 만능 스포츠맨으로 거듭났다.

그는 도움을 받기만 하는 지적장애인이 아니라 인라인스케이트 보조교사라는 직업이 있는 사회인으로 성장했다. 그의 어머니 김정희 씨는 “지적장애가 있는 석일이는 실기시험보다 필기시험을 통과하기가 더 어려웠는데 졸린 눈을 비벼 가며 기어이 필기시험을 통과했다”며 대견스러워했다. 이날 아들의 성화 점화 모습을 본 어머니 김씨는 “너무나 자랑스럽다. 석일이가 일하면서 도전의식을 갖고 활기차게 살아가는 게 뿌듯하다”며 감격스러워했다.

어릴 때 소뇌 90% 잘라낸 박모세 '기적의 열창'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평창 동계스페셜올림픽의 개막식은 뇌의 대부분을 잃은 청년이 부르는 감동적인 애국가로 공식행사를 시작했다. 노래를 부른 박모세씨(21·사진)는 29일 강원 평창의 용평돔을 가득 메운 4200여명의 참가자들에게 아름다운 선율로 희망과 행복을 선사했다.

박씨는 사람이 지닐 수 있는 모든 장애를 지녔다는 소리를 들으며 살아왔다. 1992년 태어나자마자 후두부 두개골이 없어 뇌가 흘러나오는 뇌류(腦瘤) 판정을 받았다. 병원에선 생존 확률이 0%라고 했다.

그는 대뇌의 70%, 소뇌의 90%를 잘라내는 대수술을 받아야 했다. 담당 의사는 “생명을 유지해도 뇌의 대부분을 절단해서 보고, 말하고, 듣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기적이 일어났다. 앞을 잘 보지 못하지만 그는 다섯 살 때 말문이 갑자기 터지면서 주기도문을 줄줄 외웠다. 듣고 기억했던 소리를 모두 따라했다. 교회에서 찬송가를 흉내내기 시작하고 2년 뒤엔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에게 노래는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2001년 삼육재활학교 초등과정 시절 여자프로농구 경기에서 애국가를 부른 게 그의 공식 데뷔 무대였다. 2007년부터 수원시 장애인합창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지난해 경북 경산시에서 열린 한국스페셜올림픽 전국하계대회 개막식에서도 애국가를 불렀다.

이번 무대를 위해 겨우내 교회에서 노래 연습을 했다는 그는 “노래는 내 삶의 희망이고 축복”이라며 “노래 부를 때 모든 게 행복하니까 노래가 좋다”고 말했다. 어머니 조영애 씨는 “장애를 이기고 세계 지적장애인의 축제에서 강렬한 메시지를 던진 아들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용평돔에 울려퍼진 '투게더 위 캔' 합창

평창 동계 스페셜올림픽 개막식은 ‘투게더 위 캔(Together We Can)’이라는 슬로건처럼 지적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우러진 축제의 장이었다.

개막식은 29일 강원도 평창 용평돔에서 각국 선수단 입장으로 시작됐다. 올림픽의 발상지인 그리스 선수단 45명이 가장 먼저 입장했다. 베트남, 태국, 몽골, 파푸아뉴기니, 파키스탄, 네팔, 캄보디아 등 스페셜올림픽에 처음 출전하는 나라 선수단이 무대에 오를 때마다 선수들은 큰 소리로 환호했다. 247명으로 최대 인원을 내보낸 한국 선수단이 마지막으로 용평돔에 입장했다. 선수들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웃으며 관중들과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며 즐거워했다. 벨라루스, 에콰도르, 수단, 키르기스스탄 등은 대회 출전 직전 불참을 통보해 참가 국가는 106개 나라로 확정됐다.

개막을 알리는 카운트다운이 끝나고 태극기가 깃대 위에 올랐다. 이어 장애를 딛고 선 지적장애인 가수 박모세 씨가 어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애국가를 열창했다. 그가 큰 눈을 깜빡이며 무반주에 애국가를 맑은 목소리로 부르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지적장애인 자원봉사자인 글로벌 메신저의 소개로 단상에 오른 나경원 평창 동계 스페셜올림픽 조직위원장은 환영사에서 “이곳 평창에서 시작한 동행으로 지적장애인이 세계 어느 곳에서 태어나고 살아가든지 모두 행복하고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우리 함께하자”며 선수단에게 희망을 북돋아줬다.

이어 미얀마의 민주화 운동가 아웅산 수치 여사와 대한민국의 ‘피겨여왕’ 김연아가 글로벌 메신저와 함께 단상에 올라 스페셜올림픽과 지적장애인의 꿈을 소개했다.

그리스에서 채화된 성화는 파푸아뉴기니 선수의 손에 들려 용평돔에 들어왔고 한국의 황석일 선수에게 마지막으로 건네졌다. 황석일 선수가 성화대에 불을 붙이는 순간 밤하늘에선 화려한 불꽃놀이가 펼쳐졌다.

개막식 분위기는 편견과 차별이 없는 세상을 꿈꾸는 ‘스노맨’의 성장을 좇는 이야기를 그린 공연에서 절정에 달했다. 선수들은 어머니의 숭고한 사랑으로 빙판 위에서 다시 일어나는 스노맨의 이야기를 보면서 동료들을 얼싸안으며 자신의 이야기처럼 공감했다.

평창=서기열 기자 phil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