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발목'…조선1위 中에 빼앗겨
A조선사는 몇 달간 공을 들인 끝에 해외 선주로부터 대형 수주를 따냈다. 수주 가뭄 속에 단비와 같은 쾌거인데도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다. 금융회사들을 돌아다녔으나 지원할 수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 결국 건조 비용을 마련하지 못해 계약을 취소해야 할 위기에 처했다. 회사 관계자는 “정책적으로 선박제작금융을 대주는 중국 조선사에 일감을 빼앗기게 됐다”며 “한국이 세계 조선 수출 1위 자리를 중국에 내준 것은 금융 지원을 못받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0일 금융위원회 등에 따르면 정부는 지난해 9월2일 국민 우리 신한 하나 외환 등 5개 시중은행을 참여시킨 4조원 규모의 선박제작금융 지원 프로그램을 가동했으나 아직까지 시중은행의 지원 실적은 한 건도 없다.
이 프로그램은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해 7월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 “조선업체를 지원하기 위해 수출입은행뿐 아니라 산업은행 정책금융공사 시중은행들도 나서야 한다”고 주문하면서 만들어졌다. 금융위는 정책금융공사와 산업은행이 1조원, 5개 시중은행이 3조원 등 총 4조원을 지원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시행에 들어간 지 4개월이 지나도록 정책금융공사 3500억원, 산업은행 2000억원 정도 외에 시중은행의 지원 실적은 없다.

애당초 시중은행 ‘동원’의 실효성이 낮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대형 조선사들도 동일인 여신한도가 차 있어 신규 지원을 하기가 쉽지 않다”며 “시중은행이 지원한다는 당시 발표는 충분한 협의 없이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리스크가 큰 중소형 조선사들은 아예 지원 검토 대상에 들지도 않는다고 덧붙였다.

조선업계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계약 때 선수금으로 10~15%, 나머지 대부분 대금은 건조한 선박을 인도할 때 받는 ‘헤비 테일(heavy tail)’ 결제 방식이 일반화하면서 금융 지원 없이는 배를 만들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입을 모은다. 중국과 유럽 조선사들은 건조 비용의 60~80%가량을 지원받고 있다. 지난해 1~10월 한국의 선박 수출액은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28.2% 감소한 335억달러로 중국(336억달러)에 1위 자리를 내줬다.

서욱진 기자 venture@hankyung.com

■ 선박제작금융

조선사가 선박을 수주한 뒤 건조해 선주에게 넘길 때까지 필요한 돈을 제공하는 대출. 원자재 구입 등 선박 건조 비용으로 쓴다. 선박 대금의 대부분을 인도할 때 받는 결제 방식이 일반화하면서 중요성이 커졌다. 한국에서는 주로 수출입은행이 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