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안정이 최우선 과제
강력한 재정 준칙 세우고 공약 재정비해야…집단 이기주의 휘둘리지 말고 국민 설득을
시행착오 줄이려면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분명히 하길…주변 인물보다 능력 중심으로 인사해야
“재정 건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간략하면서도 명확한 재정 준칙을 먼저 확립해야 합니다.”(박상원 한국외국어대 교수)
“청년 일자리를 확대하려면 일자리 미스 매칭부터 줄여야 합니다. 서비스 분야의 규제도 대폭 풀어야 합니다.”(오상봉 국제무역연구원장)
새해를 앞두고 한자리에 모인 한경아젠다위원회 위원들이 차기 정부를 이끌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에게 주문한 내용들이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명확한 원칙, 우선 순위를 정한 뒤 차질없이 이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새 정부 출범에 앞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명히 해야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지난 28일 이학영 부국장의 사회로 진행한 ‘2012년 결산 위원회’에서는 박오수 서울대 교수, 오상봉 국제무역연구원장, 홍기택 중앙대 교수, 손재영 건국대 부동산대학원장, 장원창 인하대 교수, 박상원 한국외국어대 교수 등이 참석해 새 정부의 국정 운영 방향을 놓고 다양한 의견을 나눴다.
▷사회=박근혜 당선인이 사상 첫 과반을 득표하며 당선됐습니다. 하지만 2013년은 대내외적으로 매우 어려운 한 해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당선인이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박상원 교수=재정 준칙을 먼저 수립해야 합니다. 재정 준칙은 세입, 세출, 국가부채 등 재정지표를 앞으로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를 미리 약속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국가부채를 국내총생산 대비 몇% 이내로 하겠다’, ‘세출 증가는 몇% 이내로 하겠다’ 등의 방식이 있을 수 있겠죠. 이명박 정부도 세출 증가를 세입 증가 이내로 억제하겠다는 원칙을 내세웠지만 새 정부는 보다 강력한 준칙을 세워야 할 것 같습니다.
▷홍기택 교수=재정 준칙 확립과 함께 복지 공약의 우선 순위를 정해야 할 것입니다. 중구난방으로 돼 있는 복지 관련 공약도 재정비해야 합니다. 또 재정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실행속도를 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반대로 잠시 미뤄둬야 하는 공약은 무엇입니까.
▷장원창 교수=경제민주화는 일단 우선 순위에서 미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 당선인은 대규모 기업집단에 대한 신규 순환출자 금지 등 구체적인 경제민주화 대책을 내놨습니다. 하지만 올해 경제 상황을 따져보면 굉장히 불안한 게 사실입니다. 경제민주화를 공약대로 추진할 경우 시장의 기능은 위축되는 반면 공공부문만 비대해지는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경제의 활력을 기대할 수 없죠.
▷손재영 원장=부동산 공약도 백지에서 점검해야 한다고 봅니다. 지난 대선에서는 주택·부동산 가격보다 하우스푸어 문제가 이슈로 더 부상했습니다. 박 당선인은 하우스푸어 상태에 빠진 주택의 지분 일부를 공공기관에 넘기고 그 지분만큼 임대료를 내도록 하는 보유주택 지분매각 제도 등을 약속했습니다. 물론 하우스푸어를 양산한 가계대출 문제는 한국 경제의 뇌관입니다. 하지만 도덕적 해이를 극도로 부추기거나 재원 측면에서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는 공약은 원점으로 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일자리 창출도 차기 정부에 중요한 과제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박 당선인이 약속한 일자리 대책에 대해 평가해 주십시오.
▷홍 교수=올해 성장률은 3% 이하로 떨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는 신규로 고용시장에 진입하는 인력을 수용하기도 힘들 것입니다. 박 당선인이 공약한 것처럼 공공부문 청년층 일자리 확대는 단기적으로 실업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오상봉 원장=저는 일자리 미스 매칭부터 해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청년 취업난이 심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인력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 중견·중소기업들이 많습니다. 장기적으로 이 같은 인력 미스 매칭을 해소하지 않고서는 일자리 창출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정부 어디에도 미스 매칭 관련 자료나 통계가 없다는 점입니다. 실태를 파악해야 대책을 마련할 수 있는데, 아직 그런 노력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사회=하지만 청년들은 여전히 대기업 등 좋은 일자리를 원하지 않습니까. 단기적으로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방법은 없을까요.
▷장 교수=기업들이 투자를 늘리지 않으면 고용문제를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세제든 금융이든 기업의 투자를 살릴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오 원장=규제 완화를 통한 일자리 창출도 고민해야 합니다. 법률 의료 엔지니어링 등 서비스 분야 규제만 풀어줘도 일자리가 많이 생길 것입니다. 또 해외 취업을 적극 독려해야 합니다. 박 당선인도 청년들의 해외 취업 확대를 일자리 확대 정책으로 공약하지 않았습니까. 예를 들어 대학교 1학년 때부터 해외 취업 과정을 만들어 언어부터 실무능력까지 교육하는 것이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손 원장=대기업 취업문이 좁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일단 들어가면 굉장히 좋죠. 급여나 후생조건이 상당합니다. 이 부분에 착안해 일종의 잡 셰어링(job sharing·일자리 나누기)을 시도해보는 것도 괜찮을 듯합니다. 대기업들이 초봉을 낮추는 대신 인원을 많이 뽑는 방법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죠. 대학을 졸업한 뒤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우선 제공하는 것이죠.
▷사회=당선인이 공약을 실천하는 것과 동시에 국민에게 냉철한 고언(苦言)을 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박오수 교수=집단 이기주의에 휘둘리지 말라고 주문하고 싶습니다. 특히 에너지 문제와 관련해 집단 이기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원전을 지을 때 지역에서 반대가 많습니다. 하지만 원전은 국내 에너지 생산의 30% 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대체에너지를 개발해도 상용화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고준위 폐기물 처리 문제도 노무현, 이명박 정부 때 해결이 안돼 차기 정부 과제로 미뤄졌습니다. 갈등과 반발을 피하려다 사회 전체의 이익을 해쳐서는 안 됩니다. 박 당선인은 이런 문제에 대해 확고한 원칙을 가지고 국민을 설득해야 합니다.
▷홍 교수=연금 고갈 문제도 들여다보면 상당히 심각한데 선거 과정에서 아무런 언급이 없었습니다. 표와 직결되는 문제였을 테니까요. 특히 이번 선거에서 50대 이상 고령층이 박 당선인을 압도적으로 지지한 만큼 연금 개혁 문제를 꺼내기가 더욱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국민연금, 군인 공무원 교원 등 특수직 연금은 현 상태를 지속하기 어렵다는 분석이 많습니다. 이들 연금에 대해 강력한 개혁 의지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박상원 교수=덧붙이자면 연금은 수익자 부담이 맞습니다. 보편성을 필요로 하는 복지는 정부가 부담하는 것이 맞지만 연금 등 사회보험은 수익자 부담 원칙을 명확히 지켜야 합니다. 특수직 연금을 일반 예산으로 해결하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사회=인수위원회 구성이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인수위에 제언을 한다면.
▷오 원장=차기 정부 출범 뒤 1년간은 경제 안정이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될 것입니다. 인수위는 이에 대한 준비를 우선시해야 합니다. 이번 경기 침체는 상당히 오랫동안 이어질 전망입니다. 저성장 시대가 본격화하는 것이죠. 차기 정부도 뾰족한 수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때문에 선거 때 내놓은 공약을 무리하게 지키기보다는 경제를 먼저 안정시킬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합니다. 영세 중소기업의 구조조정 문제도 사회적으로 대두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경제 전반의 안정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총력 대응 체제를 갖춰야 합니다.
▷박오수 교수=이명박 정부 출범 초기 인사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주변 인물보다는 능력 위주로 인물을 선발해야 합니다. 다행히 지금 인수위 인선을 보면 그런 기조가 나타나고 있는데요, 앞으로 내각과 청와대 인선을 할 때도 당선인이 자신감을 갖고 인사 기조를 지켜 나가기 바랍니다.
사회=이학영 편집국 부국장
정리=조미현 기자 mwise@hankyung.com
■ 한경 아젠다위원회는
국내 경제 분야 최고 전문가와 학자들로 구성해 지난해 초 출범했다. 한국경제신문 편집국과 오피니언 리더 간 소통의 가교 역할을 하며 월 1회 정기적으로 한국 사회의 주요 이슈를 논의해오고 있다. 경제부 산업부 국제부 등 주요 부서 기자들도 참여해 이들의 의견과 제언을 지면에 반영하고 있다.
한경아젠다위원회는 올해도 한국경제신문이 시대적 소명에 부응하는 정론을 펴고 실질적이고 유익한 정보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도록 활동을 강화해 나갈 예정이다. 특히 새 정부 출범을 전후로 나타날 수 있는 정책적 시행착오와 포퓰리즘적 행태를 감시하고 비판하는 데 주력할 생각이다.
위원회에는 박오수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 오상봉 국제무역연구원장, 홍기택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손재영 건국대 부동산대학원장, 장원창 인하대 경제학과 교수, 박상원 한국외국어대 국제통상학과 교수, 정호성 삼성경제연구소 글로벌연구실 수석연구원이 참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