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수의 트리밍 드리밍] 까치 오혜성과 돌아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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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수의 TRIMMING DREAMING] 4편. 사진작가 이진수의 꿈의 연대기 - 까치 오혜성과 돌아이(3)
저의 두 번째 꿈이 자라난 것은 중학교2학년 때였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평소 수줍은 성격의 저는 점차 무언가 가슴 속에서 꿈틀 거리는 무언가를 느꼈습니다. 춤도 추고 싶어지고 노래도 흥얼거리게 되며 이소룡을 흉내내게 된거죠. 당시에 기억하기론 최초의 브레이크 댄스영화인 `breakin(1984)`, Herbie Hancock의 연주곡 Rockit은 저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지금은 흔하지만 획기적인 LP판으로 만들어 내는 디제이 스크래칭, 윈드밀과 현란한 웨이브, 마이클잭슨의 문워킹은 80년대를 새롭고 풍요로운 뉴웨브로 만드는 시기였습니다. 적어도 제 시선으로는 80년대가 우울한 독재정권이였다라는 것을 전혀 모를 나이었으니까요.
* 영상설명 :Herbie Hancock의 Rockit 뮤직비디오
비디오와 교본으로 얼추 익힌 브레이크 댄스인 윈드밀이나 웨이브는 소풍이나 학예회 때` rockit`음악에 맞춰 추곤 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나름 B-boy였다고 할 수 있죠. 마이클 잭슨의 ‘beat it’에 맞춰 문워킹을 잘 추는 같은 반 친구 현민과 춤에 있어서 라이벌 관계에 있었습니다. 사실은 현민이 훨씬 여자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저의 춤은 브레이킹 동작이 많아서 좀 더 기술적이었지만 그의 춤은 코믹했죠.
이 때 팝송에도 관심이 생기게 되어 보이조지가 유명했던 그룹 culture club의 `Karma chameleon` 팝송을 소리나는 대로 가사를 따서 부르고 다니기도 했죠. `커머 커머 커머 커머 커머 커맬리온 유커맹고 유커맹고 오호호~` 이렇게 따라 부르던 가사였던 `유커멩고`가 먼 훗날 ‘you come and go’였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실소를 금치 못했습니다.설상가상으로 USA for Africa의 `위 아 더 월드`를 각 아티스트별로 모창한다며 따라 부르기도 했죠. `델컴투타임 ~웬위 히드 셜콤 웬 더 월 머스트 컴 투게게더 원`
방과 후에는 합기도장을 다녔는데 가방엔 쌍절곤을 가지고 다니기도 했습니다.한 번 쯤은 모두 이소룡에 심취해 봤을겁니다. 학교 근처 골목에서 돈을 뺐고 있는 불량배의 팔을 합기도 식으로 꺽어 제압하기도 했었죠. 무술소년이 되고 만화가의 꿈은 바뀌게 됩니다. ‘너 만화가가 되면 밥 굶는다’ 라는 주변 분들의 현실을 직시했던 걸까요? 이 무렵 제2기의 꿈이 태동한거죠. 영화감독 겸 배우로 바뀌게 된겁니다. 특히 액션영화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류승완 감독처럼 되고 싶었던 듯 합니다.
은평구의 연신내, 지금은 없어진 동시상영관 양지극장, 영화 우뢰매를 즐겼던 곳, 영화’소림사’를 보러 갔다가 동시상영중인 전설의 명작 영화‘무릎과 무릎사이’를 우연히 보게 되면서 인체의 신비에 대해 공부할 수 있던 그 거리, 연신내 촌놈이었던 저는 종로에만 나와도 커다란 세계에 놀라곤 했습니다. 양지극장과 대조시장이 가장 큰 번화가였던 저에게 종로는 마치 뉴욕의 맨해튼 같은 곳이었습니다. 교보문고에서 구입한 ‘연기의 이해’,‘시나리오 작법’ 등을 교본 삼아 나름 두 번째 꿈을 혼자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홍콩 무협시리즈 드라마들의 대사와 무공까지 따라 할 정도 였으니까 혼자 노는 데는 정말 대가였습니다.방학 때 중3이라고 속이고 종로 YMCA의 기계체조를 한 달 정도 배웠을 정도였습니다. 당시 덤블링 연습을 하면서 알게 되었던 절권도를 배웠다는 고1형과의 대화는 참 웃겼습니다.
당시엔 람보와 코만도가 최고의 인기였습니다. 람보의 로켓발사기를 근육질의 실베스터스탤론이 들고 있던 람보의 포스터는 모든 학생들의 영웅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두용 감독,전영록 주연의 ‘돌아이’시리즈도 성룡 류의 영화와 람보의 퓨젼영화였는데 시리즈가 3편까지 나올 정도로 최고의 히트였습니다. 카 체이싱도 있고 폭파씬도 있는 당시 최고의 액션영화였습니다.
만화를 그렸을 때 , 영화를 보고 꼭 그 영화를 만화로 옮겼었던 저는 바로 밥상을 책상삼아 돌아이 4탄의 시나리오 집필에 착수합니다.
시놉시스는 올림픽스타디움을 폭파하려는 북한 테러범과 일본 적군파. 그들의 위협에 맞선 3명의 합기도, 태권도, 쿵푸의 특기를 가진 소년들의 좌충우돌 이야기. 리듬체조 선수인 같은 학교 민정과의 러브라인. 물론 나와의 러브라인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었습니다. 1,2,3편의 주연이었던 전영록을 주인공의 형으로 등장시키고 전영록의 여자 친구가 알고 보니 민정의 언니라는 나름 반전의 스토리였습니다. 공책 맨 뒤에는 이 영화를 영화화하기 위해 영화사와 미팅을 잡으려고 전화번호 책을 뒤져 몇 개의 영화사 리스트가 있었습니다. 통화를 하기 위한 멘트도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제가 아주 재미있는 시나리오를 만들었습니.영화화를 위한 조건으로는 우선 제가 주연을 할 수 있게 해주셔야 합니다.’ 결국 몇 제작사를 찾아가서 미팅을 하기도 하는 당돌함이 있었습니다. 물론 결과는 더 공부 많이 해서 다시 와달라는 답이었지만, 엉뚱한 중학생과의 미팅을 한 관계자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흥미로운 것은 훗날 이 시놉시스와 비슷한 ‘쉬리’라는 영화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올림픽 스타디움에 대한 테러. 이것과 둘러싼 음모와 액션신. 이런 장면이 시나리오에도 나옵니다. 언젠가 기회가 있다면 돌아이 리메이크를 만들 수 있을까요? 종로가 가장 큰 세계였던 그 때의 세계관을 생각하면 엉뚱하고 치열했습니다. 중딩 이진수, 꽤나 용감했습니다.
마지막 제 3기의 꿈은 고등학교 입시를 위한 연합고사가 끝나고 고등학교를 진학하고 학교 사진부 클럽에 가입하면서 부터 시작됩니다. 점심시간이 끝나면 항상 사진부실에 모여 선배들에게 기술 교육을 받았습니다. 사진기술개론이라는 전설의 개론 책을 이용하여 쪽지 시험도 보기도 했습니다. 남산 식물원이나 인천 소래로 출사를 나가기도 했습니다.매년 열리는 학교 축제에 사진부의 사진전은 꽤 그 근방에서는 유명했습니다. 근처의 선일여고 동명여고 예일여고 학생들까지 놀러오는 가장 설레는 순간이었습니다. 특히 카디건으로 맞춰 입은 우리 부원들은 전시장에 여학생들이 들어오면 사진 설명을 해주곤 했습니다. 제가 찍었던 사진은 남산의 불꽃놀이를 장시간 노출로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생애 첫 전시 이 때가 고등학교 1학년 가을이었습니다. 어설피 사진작가의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감동적인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저에게 2학년이 되던 해 큰 사건이 생깁니다. 당시 음악잡지 포토뮤직이라는 잡지가 유명했습니다. 표지로 이승철.최수종, 이선희 등의 스타들이 나올 때였죠. 그 잡지사에서 주최한 전국 모델촬영대회에 동기들과 참가하였습니다.서울랜드였습니다. 모델로 나온 사람은 그 때만 해도 신인이었던 신은경, 오연수 등이었습니다. 많은 참가자들이 팀을 이뤄 동시에 에워싸며 촬영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학교 앞 단골 현상소 아저씨가 컬러인화를 잘 해주셔서 우편으로 사진들을 보내 응모하였습니다. 한 달 후 책방에서 잡지를 사봤습니다.‘oo고교 2학년 이진수군 대상선정’경악할 일이었습니다. 부상으로 인X 오디오 한 세트를 받았습니다. 대상과 은상 동상을 서클 동기들이 휩쓸었습니다. 막연하게 사진작가의 꿈을 가지고 있던 저에게 큰 모멘텀이 되었던 것 입니다. 사진관 할거냐고 반대하시던 부모님의 사진학과 진학의 허락도 이 때 받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저의 미래에 대한 꿈은 결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못믿으시겠지만 반에서 1~2등을 했었고 고3이 되서 점수에 맞춰 과를 선택하는 여느 친구들과 달리 목표인 학교,학과는 단 하나였습니다. 그 해 겨울 학력고사, 수석으로 입학하게 됩니다. 이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지인들에게 대학 등록금이 뭐죠?라고 우스게 농담을 던지기도 합니다. 방학 때 마다 유명사진작가 선배들 밑에서 실습을 했고 대학교 4학년 때부터 취업을 했습니다. 최고의 패션사진작가로 인정받았던 조세현 작가 등 유명사진가의 스튜디오에서 박봉을 받으며 눈물젖은 빵도 먹어 가며 3년간의 어시스턴트를 거칩니다. 2002년 어느 덧 논현동에 나만의 스튜디오를 갖게 되었습니다. 엘르,엘르걸,보그걸,마리끌레르,로레알,슈에무라,에스티 로더 등에 발탁되면서 프로페셔널 포토그래퍼로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3기에 걸친 나의 꿈은 모두 시각 예술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지금껏 3회에 걸쳐서 제가 꿔온 꿈을 장황하게 이야기 했습니다만 어찌 보면 저는 행운아입니다.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으니까요. 지난 여름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사무국에서 기쁜 전화를 받았습니다. 제 영화가 공식 초청 상영작으로 선정되었다는 전화였습니다. 영화사를 찾아다녔던 키노키드였던 그 때가 1987년이었으니 25년만에 두 번째 꿈을 이루는 순간이었습니다. 스크린에 상영되기 전 가슴을 쥐어짜는 뭉클함과 긴장감이란… 그 설레임을 잊을 수 없을 듯 합니다.
꿈을 꿔왔고 그 꿈을 기억해 내었고 꿈을 이뤄 왔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말이죠. 하지만 모든 꿈을 하나의 패키지로 담을 가장 큰 꿈이 남은 셈이 되었습니다.
바로 감각이라는 컴퓨터 서버 같은 것이 있다면 다양한 표현의 툴로서 영화든 사진이든. 음악이든 꺼내어 감각을 보여주는 일상의 표현 . 이것이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꿈인 것이죠. 그저 막연한 꿈이 아닌 검증되고 표현되었던 작은 조각들이며 현실이었던 그 꿈을 퍼즐처럼 맞춰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직업의 당신이든지 현재 지치고 어깨가 쳐져있을지라도 좋아했던 무언가를 한 번 떠올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꿈을 뒤돌아 보라고. 꿈은 이루라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기억은 추억을 ,추억은 희망을 다시 일깨울 수 있습니다. 꿈은 가슴에 품기 때문에 아련하고 몽롱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슬프고 아쉽고, 그러나 찬란합니다. 이상과 꿈 그리고 현실... 미래는 지금 다시 꾸는 꿈에 따라서 더욱 찬란해 질 겁니다.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칼럼 3회에 걸쳐서 저만의 추억이야기를 주저리했던건 말이죠.
저는 오늘 기억이라는 추억에 젖습니다. 응답했던 1987
오혜성과 돌아이... 그들은 적어도 치열했던 저의 꿈에 관한 연대기의 영웅들입니다.
‘꿈을 기억해야 해. 그것이 당신을 살아있게 만들거야’ - 오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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