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주 "골프는 神이 준 불씨…뜨겁게 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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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Story - 자서전 출간한 '코리안 탱크'
고교때 줄 잘못서 골프부원 돼…쇠파이프로 타이어 때리며 연습
연습장 손님차 닦아 그린피 충당
고교때 줄 잘못서 골프부원 돼…쇠파이프로 타이어 때리며 연습
연습장 손님차 닦아 그린피 충당
1988년 전남 완도수산고에 입학한 최경주는 ‘역도해본 사람 나와라’는 소리를 듣고 나갔다가 줄을 잘못 서 골프부원이 됐다. ‘꿩 사육장’처럼 생긴 연습장에서 처음 본 수천개의 골프볼은 마치 꿩알 같았다. 140m 떨어진 그물망까지 볼을 치는 사람은 ‘볼 정리 열외’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인 그는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듯 생애 첫 티샷을 날렸다. 볼은 그물망을 넘어 홈런이 됐다.
그때 최경주는 가슴속에 심상치 않은 불이 붙은 것을 깨달았다. “하얀 볼이 길게 날아갈 때 가슴에 탁 하고 붙은 작은 불씨는 지금도 꺼지지 않고 오히려 더 커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불씨였습니다.”
한국 최고의 프로골퍼 최경주 선수가 자서전 《코리안 탱크, 최경주》(비전코리아·사진)를 출간했다. 그는 8일 서울 광화문 파이낸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자서전이라기보다는 인간 최경주가 걸어왔던 길을 공유하려고 했다”며 “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희망을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한(恨) 많은 열등아”
그는 행운과 거리가 멀었다고 했다. 초등학교 축구부 시절에는 물주전자만 들고 다녔다. 중학교 때 역도를 하면서 후배에게 밀리는 수모도 겪었다. 골프를 배운 뒤에는 그린피를 벌기 위해 연습장 손님 차를 세차하고 잔심부름을 했다. 자기 채도 없이 트럭을 타고 골프장에 다니던 그는 광주CC에서 이름표가 달린 새 카트를 타고 다니던 국가대표 상비군 선수들을 보고 너무나 부럽고 서러워 지금까지 그 이름표를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운동밖에 몰랐던 소년. 서울에 온 뒤 “63빌딩을 10층까지 보는 것은 무료지만 그 이상은 돈을 내야 한다”는 친구들의 놀림에 9층까지만 보고 눈을 내리깔았을 정도로 순진했다.
프로가 된 뒤에는 텃세에 시달렸다. 1995년 프로 첫 우승 때도 볼을 살 돈이 없어 동료의 이름이 새겨진 볼을 들고 나갔다. 미국 PGA투어에 진출한 뒤에는 키가 작아 러프에 들어간 볼을 쳐내기 불리하자 키를 늘리는 수술을 검토하기도 했다.
○“최경주는 신을 감동시켰다”
1999년 일본 기린오픈 대회장 근처 호텔은 매우 작았다. 누워서 골프채로 전깃불을 껐다. 연습라운드 첫날 오전 좁은 침대에서 아들 호준이를 품에 안고 웅크린 채 잠든 아내를 보자 가슴이 뻐근해졌다. 자신도 모르게 기도가 나왔다.
최종라운드에서 인도의 지브밀카 싱과 엎치락뒤치락 승부를 벌였다. 마지막 홀에서 네 발자국 거리의 파퍼팅을 성공하면 연장전에 갈 수 있는 상황. 그는 “처음으로 경기 중에 눈을 감고 손을 모아 기도했다. 눈을 떴더니 볼에서 홀컵까지 마치 호미로 판 것처럼 퍼팅 라인이 선명하게 보였다”고 회상했다. 그 퍼팅을 성공시키고 너무 흥분한 나머지 스코어 접수처에 장갑과 야디지북을 놓고 와 맨손으로 연장전을 벌여 첫 해외 우승컵을 안았다.
두 번째 퀄리파잉스쿨에 갔을 때도 마지막 홀 파퍼팅을 성공해야 합격이었다. 그는 “이대로 돌아가야 합니까. 볼이 들어가는 길을 보여주시면 제가 넣겠습니다”라고 기도했다. 기도를 하고 눈을 뜨자 볼에서 컵까지 하얀 선이 그려져 있었다. 미국의 한 기자는 “신이 타이거 우즈를 선택했다면 최경주는 신을 감동시켰다”고 표현했다.
○흘린 땀을 정확히 계산해준다
중학교 시절 아버지를 도와 개펄에서 일할 때 물고기가 가득 든 대야를 끌고 1㎞ 거리를 빠져나오곤 했다. 28인치 두께의 허벅지와 장딴지는 그때 형성됐다. 몸무게 48㎏일 때 158㎏의 역기를 들어올릴 수 있었던 힘도 거기에서 나왔다.
그는 제대로 된 레슨도 받지 못한 채 폐타이어를 땅에 파묻어 놓고 쇠파이프로 때리며 스윙 연습을 했다. 완도 옆 신지도에 있는 명사십리해수욕장에서 연습하며 바람과 벙커에 익숙해졌다.
골프를 시작한 지 4개월째, 9홀짜리 공군부대 골프장에서 가진 생애 첫 라운드에서 108타, 두 번째 라운드에서 98타를 쳤다. 그리고 한 달 뒤 78타를 기록했다. 그는 지독한 ‘연습벌레’다. “우연히 잘 맞아서 좋은 스코어를 냈다면 그것은 결코 내 것이 아니다. 행운처럼 잘 맞은 샷을 영원히 나의 굿샷으로 만드는 길은 오직 끊임없이 노력하고 연습하는 것뿐이다.”
그는 최근의 슬럼프에 대해 “나에게 슬럼프는 없다. 꾸준히 노력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 이것이 내가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한은구 기자 tohan@hankyung.com
그때 최경주는 가슴속에 심상치 않은 불이 붙은 것을 깨달았다. “하얀 볼이 길게 날아갈 때 가슴에 탁 하고 붙은 작은 불씨는 지금도 꺼지지 않고 오히려 더 커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불씨였습니다.”
한국 최고의 프로골퍼 최경주 선수가 자서전 《코리안 탱크, 최경주》(비전코리아·사진)를 출간했다. 그는 8일 서울 광화문 파이낸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자서전이라기보다는 인간 최경주가 걸어왔던 길을 공유하려고 했다”며 “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희망을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한(恨) 많은 열등아”
그는 행운과 거리가 멀었다고 했다. 초등학교 축구부 시절에는 물주전자만 들고 다녔다. 중학교 때 역도를 하면서 후배에게 밀리는 수모도 겪었다. 골프를 배운 뒤에는 그린피를 벌기 위해 연습장 손님 차를 세차하고 잔심부름을 했다. 자기 채도 없이 트럭을 타고 골프장에 다니던 그는 광주CC에서 이름표가 달린 새 카트를 타고 다니던 국가대표 상비군 선수들을 보고 너무나 부럽고 서러워 지금까지 그 이름표를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운동밖에 몰랐던 소년. 서울에 온 뒤 “63빌딩을 10층까지 보는 것은 무료지만 그 이상은 돈을 내야 한다”는 친구들의 놀림에 9층까지만 보고 눈을 내리깔았을 정도로 순진했다.
프로가 된 뒤에는 텃세에 시달렸다. 1995년 프로 첫 우승 때도 볼을 살 돈이 없어 동료의 이름이 새겨진 볼을 들고 나갔다. 미국 PGA투어에 진출한 뒤에는 키가 작아 러프에 들어간 볼을 쳐내기 불리하자 키를 늘리는 수술을 검토하기도 했다.
○“최경주는 신을 감동시켰다”
1999년 일본 기린오픈 대회장 근처 호텔은 매우 작았다. 누워서 골프채로 전깃불을 껐다. 연습라운드 첫날 오전 좁은 침대에서 아들 호준이를 품에 안고 웅크린 채 잠든 아내를 보자 가슴이 뻐근해졌다. 자신도 모르게 기도가 나왔다.
최종라운드에서 인도의 지브밀카 싱과 엎치락뒤치락 승부를 벌였다. 마지막 홀에서 네 발자국 거리의 파퍼팅을 성공하면 연장전에 갈 수 있는 상황. 그는 “처음으로 경기 중에 눈을 감고 손을 모아 기도했다. 눈을 떴더니 볼에서 홀컵까지 마치 호미로 판 것처럼 퍼팅 라인이 선명하게 보였다”고 회상했다. 그 퍼팅을 성공시키고 너무 흥분한 나머지 스코어 접수처에 장갑과 야디지북을 놓고 와 맨손으로 연장전을 벌여 첫 해외 우승컵을 안았다.
두 번째 퀄리파잉스쿨에 갔을 때도 마지막 홀 파퍼팅을 성공해야 합격이었다. 그는 “이대로 돌아가야 합니까. 볼이 들어가는 길을 보여주시면 제가 넣겠습니다”라고 기도했다. 기도를 하고 눈을 뜨자 볼에서 컵까지 하얀 선이 그려져 있었다. 미국의 한 기자는 “신이 타이거 우즈를 선택했다면 최경주는 신을 감동시켰다”고 표현했다.
○흘린 땀을 정확히 계산해준다
중학교 시절 아버지를 도와 개펄에서 일할 때 물고기가 가득 든 대야를 끌고 1㎞ 거리를 빠져나오곤 했다. 28인치 두께의 허벅지와 장딴지는 그때 형성됐다. 몸무게 48㎏일 때 158㎏의 역기를 들어올릴 수 있었던 힘도 거기에서 나왔다.
그는 제대로 된 레슨도 받지 못한 채 폐타이어를 땅에 파묻어 놓고 쇠파이프로 때리며 스윙 연습을 했다. 완도 옆 신지도에 있는 명사십리해수욕장에서 연습하며 바람과 벙커에 익숙해졌다.
골프를 시작한 지 4개월째, 9홀짜리 공군부대 골프장에서 가진 생애 첫 라운드에서 108타, 두 번째 라운드에서 98타를 쳤다. 그리고 한 달 뒤 78타를 기록했다. 그는 지독한 ‘연습벌레’다. “우연히 잘 맞아서 좋은 스코어를 냈다면 그것은 결코 내 것이 아니다. 행운처럼 잘 맞은 샷을 영원히 나의 굿샷으로 만드는 길은 오직 끊임없이 노력하고 연습하는 것뿐이다.”
그는 최근의 슬럼프에 대해 “나에게 슬럼프는 없다. 꾸준히 노력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 이것이 내가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한은구 기자 toh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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