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십자는 혈액제제와 백신제제 등 특수 의약품을 주로 취급하는 회사다. 혈액제제는 혈액을 원료로 하는 의약품을 말한다. 녹십자는 혈액응고제, 알부민제제, 면역글로불린제제 등 혈액제제를 생산·판매하고 있다. 혈액제제와 백신제제가 녹십자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해 44.5%에 달했고, 올해는 41.3%로 추정된다.

특수 의약품 중심의 제품라인은 녹십자의 최대 강점이다. 정부의 약가 규제로부터 자유롭고 독과점적 시장 지위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장기 성장 동력이 될 수 있고, 해외 진출도 가속화할 수 있다. 혈액제제와 백신제제는 지난 4월 기등재 의약품 약가 일괄 인하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경쟁 제약회사들에 비해 약가 인하에 따른 실적 감소가 미미했다.

녹십자는 혈액제제와 백신제제 시장에서 독과점적 지위를 구축하고 있다. 혈액제제를 생산하기 위해 국내의 주요한 혈액 공급처인 적십자로부터 혈액을 공급받는 회사는 녹십자와 SK케미칼뿐이다. 해외에서 혈액을 수입하는 회사는 녹십자가 유일하다.

백신제제도 마찬가지다. 녹십자는 국내 제약사 중 유일하게 독감백신 원료를 생산하고 있다. 국내 독감백신 반제품(벌크) 공급량의 대부분을 녹십자가 책임진다. 국내 독감백신 시장을 과점하고 있다. 이 회사는 이런 국내 시장을 발판으로 가격 경쟁력을 확보, 글로벌 시장을 활발하게 공략하고 있다.

녹십자는 신약후보물질(파이프라인) 연구·개발 과제로 혈액제제, 백신, 유전자재조합 의약품, 항암제 등을 꼽는다. 단기, 중기, 장기적으로 상용화할 수 있는 과제들을 균형 있게 포괄하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자체 의약품을 개발, 중·장기 성장 동력을 확보하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녹십자는 자체 개발한 혈액제제와 독감백신으로 해외 진출을 추진하고 있다. 2010년 12월 4억8000만달러 규모의 아이비글로불린 에스엔(면역·감염 주사제)과 그린진에프(혈우병 치료제)의 수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현재 미국에서 임상 3상을 진행 중이다. 2014년께 미국 허가를 받아 상용화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신제품 개발도 성과를 낳고 있다. 녹십자는 올초 세계에서 두 번째로 헌터증후군 치료제 개발에 성공했다. 이 회사가 선보인 개량 바이오복제약(바이오베터)은 오리지널 제품에 비해 가격 경쟁력이 있어 일본 등 해외시장으로의 수출을 기대할 수 있다.

녹십자는 최근 이노셀로부터 항암면역세포 치료제 판권과 기술을 확보했다. 국내 상위사 중 최초로 면역세포 치료제 시장에 본격 진출할 것으로 전망된다. 또 자체적으로 NK세포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어 향후 세포치료제 라인을 다양화할 수 있다.

녹십자는 혈액제제와 백신제제를 제외한 전문 및 일반의약품 제제 비중이 낮다. 따라서 혈액제제, 백신제제와 관련된 정부 정책에 따라 실적이 좌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취약하다. 파이프라인이 바이오 의약품으로 편중돼 있는 것도 약점 중 하나다.

매출 상위 20개 글로벌 대형 제약사 중 녹십자처럼 특수 의약품 비중이 높은 회사는 단 한 곳도 없다. 제약 시장을 선도하기 위해선 특수 의약품 외에 전문 의약품 사업을 병행해야 한다.

혈액제제와 독감백신의 가격은 정부가 정하는 것이어서 정책적 가격 결정에 따른 실적 민감도가 높다. 다만 혈액제제는 환자 계층이 특수하고 혈액 확보에 애로사항이 있어 약품 가격이 급격하게 변동할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백신은 정부의 국내 자급화 정책이 추진되는 분야다. 일정 기간은 자급화에 성공한 기업체의 수익성을 보존해주는 정책적 배려가 유지될 것으로 예상된다.

녹십자의 파이프라인은 바이오 의약품으로 편중돼 있는 편이다. 바이오 의약품은 주로 중증의 난치 질환에 대한 치료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난치질환 치료제는 가격이 비싸 부가가치가 높지만, 유병률과 환자 수를 고려할 때 고혈압이나 당뇨 등 만성질환 치료제도 확보해야 글로벌 제약회사로 성장할 수 있다.

녹십자는 이 같은 약점 보완에 시급히 나설 필요가 있다. 혈액제제와 백신제제를 제외한 전문 및 일반의약품 제제 비중이 낮은 점은 해당 비중이 높은 회사를 인수하거나, 상품 도입 등을 통해 보완할 수 있다. 정부 정책과 관련해서는 회사 영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부 규제와 여론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바이오 의약품에 편중된 파이프라인은 화학 분야로 넓혀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물론 회사가 전략적으로 판단할 대목이다. 추가로 보완해야 할 것은 2014년 이후 미국 혈액제제 시장 진출과 관련한 사업 계획이 구체적으로 투자자들에게 제시돼야 한다는 점이다. 원재료인 혈액 확보에 대해서는 불확실성이 아직 남은 것 같다.

김현태 <신영증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