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즈음의 일이다. 과외가 금지돼 대학생들이 아르바이트를 하기가 무척 힘들던 때였다. 고려대 경제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한 청년은 지인의 소개로 국내 굴지의 화랑 가나아트센터(옛 가나화랑)에서 힘들게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다. 국제업무 파트에서 해외 전시회 도록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맡았다. 틈틈이 영어 공부를 한 게 도움이 됐다. 그 인연으로 1989년 대학 졸업 후 가나아트센터 국제파트에 정식 입사했다. 친구들은 금융업계나 대기업으로 들어갔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미술이 미래산업으로 떠오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청년은 40대 젊은 나이에 국내 최대 미술품 경매회사 서울옥션의 최고 사령탑이 됐다. 이학준 서울옥션 대표(46) 이야기다.

미술에 문외한이던 아르바이트생에서 국내 미술시장을 이끄는 대형 경매회사 대표가 된 그는 “10년 안에 서울옥션을 아시아 최대 경매회사로 키우겠다”며 쉼 없이 뛰고 있다.

○‘엄친아’가 미술품 경매회사 사령탑으로

1965년 서울 행당동에서 태어난 이 대표는 1남1녀의 큰아들로 자랐다. 삼성생명에서 근무한 부친은 아들을 경제전문가로 키우고 싶어했다. 학창시절 내내 부모님의 말에 귀 기울이며 열심히 공부에만 전념한 ‘엄친아’였기에 경제 전문가의 꿈은 무난했다. 하지만 대학 졸업 무렵 생각이 바뀌었다. 그동안 부모 의견을 존중했지만 결혼과 직장만은 스스로 결정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 아르바이트하며 배운 미술 사업의 꿈을 좇아 매일 미술책을 만지작거렸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어머니는 그를 보고 “네 몸엔 피 대신 미술이 흐르겠다”는 농담을 던질 정도였다.

그는 가나아트에 신입사원으로 첫 출근한 11월20일을 절대 잊지 못한다고 했다. “전 세계에 내가 기획한 전시회를 선보이겠다”는 것이 첫 출근길 그의 다짐이었다.

그는 1990년대 미국의 팝아티스트 톰 웨슬만, 재스퍼 존스, 로이 리히텐슈타인, 게오르그 바젤리츠, 장 드뷔페, 조르주 브라크, 앤디 워홀 등 해외 유명 작가들을 해외 미술의 불모지였던 서울에 소개했다. 반면 국내 작가 작품은 국제적인 아트페어(미술 5일장)인 스위스의 아트바젤과 파리 피악(FIAC)에 펼쳐보였다. 88서울올림픽 이전이라 한국 작가의 작품을 세계시장에서 판매하기란 하늘에 별따기였다.

가장 잊지 못할 화상으로 유럽 미술계를 좌지우지해온 에른스트 바이엘러를 꼽았다. ‘예술은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어야 하고, 시각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강한 인상을 남겨야 한다’는 바이엘러의 말에 감동을 받은 것이다. 1997년 이 대표는 바이엘러를 직접 만나 개런티 한 푼 없이 서명만으로 독일 작가 게오르그 바젤리츠 개인전을 성사시켰다. 1992년 미국 팝아트 거장 리히텐슈타인의 개인전을 열 때도 메이저 화랑 레오카스텔리 갤러리를 운영한 유명 화상 카스텔리를 만나 사인 하나로 작품을 들여왔다.

○코스닥 상장 기업으로 키워

가나화랑에서 일한 지 10년 후인 1998년, 그는 서울옥션(옛 서울경매) 창립 이사로 자리를 옮겨 국내 미술시장에 경매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에 매달렸다. 미술품 가격의 투명성과 객관성을 확립하고 그림 거래를 선진화해야 ‘파이’가 커진다는 생각에서다.

“대기업의 미술품 에이전트를 하면서 죽어라 일했는데 1998년 금융대란이 터진 겁니다. 기업들이 도산하면서 그림을 팔아달라고 하는데 현금화되지 않아 무척 애를 먹었어요. 가나화랑 현대화랑 선화랑 컬렉터 몇 분이 모여 우리나라도 미술품 전문 경매회사를 차릴 때라며 뜻을 모았죠. 그렇게 서울옥션이 탄생한 겁니다.”

역시 모험에 속하는 일이었다. 경매를 경험해본 사람이 없었다. 소더비, 크리스티 등 세계적인 경매회사에서 그림을 사고파는 거래를 하면서 경매에 대한 감을 키운 게 자산이 됐다. 놀랍게도 수요는 엄청났다. 그동안 서울옥션은 150여차례의 경매를 치렀다. 1999년 첫해 경매에서 불과 1억7000만원의 낙찰총액을 보이던 서울옥션은 2007년 1000억원을 기록했고, 박수근의 ‘빨래터’가 45억2000만원에 낙찰되며 국내 경매 최고가 신기록을 세웠다. 이 모든 정점에 이 대표가 있었고 국내 미술시장의 변화를 온몸으로 체득했다.

서울옥션에 입사한 지 10년, 그는 2008년 10월 서울옥션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그해 7월 코스닥에 상장된 후 3개월 만이다. 그는 연신 새로운 일을 벌여갔다. 온 힘을 다해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정신으로 도전했다. 하지만 2008년 말 찾아온 미국발 금융위기는 이 대표에게도 시련이었다.

그는 이번에도 거꾸로 치고 나가는 방식을 택했다. 역발상, 거꾸로 생각하면 늘 길이 열렸다. 미술계가 몸집을 줄이며 축소경영에 나섰지만 그는 기존 홍콩 사무소를 법인으로 전환시켰고, 서울 강남점과 인사점에 이어 부산점을 개점하며 확장 경영을 시도했다. 경매 품목도 기존 미술품에서 디자인, 건축품, 석조물로 늘려 나갔다.
2010년 경매에 이중섭의 수작 ‘황소’가 35억6000만원에 팔리며 돌파구가 보였다. 그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는 자존심이 지탱해줬다.

“외출 후 사무실에 돌아와 보니 책상 위에 메모 한 장이 놓여 있더군요. 전화를 주신 분은 ‘황소’를 소장한 사람의 지인이었어요. 지난 10년간 한 번도 경매시장에 나오지 않은 귀한 것인데 그런 작품이 이런 식으로 의뢰가 오다니 덜컥 의심이 들었어요. 작품은 경기도 의정부의 하나은행 지점에 보관돼 있더군요. 수많은 간인들이 찍힌 오동나무 상자가 있는데 상자를 여니 일반 포장지에 싸인 액자가 하나 나왔습니다.” 이 작품이 1972년 이후 40여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시장의 파이를 키우는 게 최종 목표

그는 문화가 성장동력이 되는 시대에 예술경영이야말로 국부(國富)를 늘리는 사업이라는 소신을 갖고 있다. 그는 “예술경영은 한국 작가들이 세계 속에서 도약할 수 있도록 마당을 닦아주는 작업이며, 미술품 투자는 개인의 수익뿐만 아니라 국가 경쟁력을 증진시키는 요소”라고 했다.

“최고경영자가 어떤 트렌드를 선도하기 위해서는 그 사업에 대한 열정과 확신,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아, 이 길이다’라는 확신이 없으면 중간의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없죠. 미술시장의 ‘파이’를 키우려면 그런 개척자 정신이 중요합니다. 미술품 경매시장이 꾸준히 성장하려면 누구나 쉽게 자기 그림을 팔고, 고객이 가격을 결정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합니다. 차별화된 전략만 있으면 시장은 얼마든지 있다고 봅니다.”

이를 위해 그가 세운 기준은 세 가지. 하나는 어떤 형태든 컬렉터에게 가치를 줘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미술 정보의 변화를 읽어야 한다는 것, 마지막은 모든 사람에게 사회적인 가치를 줄 수 있는 기업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내 미술시장을 이끌어가는 그는 단순한 ‘사장’보다 ‘문화 사업가’가 되고 싶다고 강조했다.

○양도세 부과는 미술 두 번 죽이는 꼴

이 대표는 “한국 미술시장이 어떻게 하면 더 발전할 수 있을 것인가를 찾는 게 서울옥션의 최대 목표”라고 했다.

“기업들이 미술시장의 저변 확대를 위해 미술품 구입을 활성화해야 해요. 국내 전업화가들이 5만명에 이르는데 뭘 먹고 삽니까. 기업이 작품을 사지 않으면 화가들은 극빈층으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내년부터 시행되는 6000만원 이상 작고 작가 작품에 대해 양도세를 부과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지금은 미술을 보호육성해야 하는 단계입니다. 시장 규모가 1조원 정도 돼야 자생력을 갖추는데 그때 양도세를 부과하면 세원도 확보하고 시장도 더 탄탄해질 겁니다. 대만은 미술품에 양도세를 부과하면서부터 시장이 엉망이 됐죠. 홍콩이 불황에도 미술품 거래가 활기를 띠는 이유는 세금이 없기 때문입니다.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에는 예술산업이 경제를 이끌어갈 겁니다. 앞으로 10년 뒤에는 미술시장이 더욱 흥미로워질 것입니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