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1조1000억원을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회사에 투자한다. 반도체 미세화 공정을 앞당겨 생산 원가를 줄이기 위해서다. 삼성의 경쟁업체인 미국 인텔과 대만 TSMC도 수조원을 투입하기로 한 이 회사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인텔 TSMC 이어 삼성전자도 투자

삼성전자는 네덜란드 반도체 노광기 제조 업체인 ASML에 약 7억7900만유로(1조1060억원)를 투자한다고 27일 발표했다. 5억300만유로는 ASML 지분 3%를 인수하는 데, 2억7600만 유로는 공동 연구·개발(R&D)비로 각각 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ASML이 고객사에 요청한 공동 투자 프로그램에 참여해 반도체 산업 발전을 앞당길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달 인텔도 이 프로그램을 통해 ASML에 약 33억유로(4조6000억원)를 투입하기로 했다. 25억유로 상당으로 ASML 지분 15%를 획득했고 나머지 8억유로를 공동 R&D에 쓰기로 했다.

TSMC도 지난 5일 ASML에 약 11억유로(1조5000억원)를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ASML 지분 5%를 인수하는 데 8억3800만유로를 사용했고 삼성전자와 비슷한 2억7000만유로는 R&D 비용으로 집행할 방침이다.

업계 관계자는 “ASML이 반도체 업계를 대표하는 3개사를 대상으로 공동 투자를 요청해 결실을 거둔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 업계 1위이며, 인텔과 TSMC는 각각 시스템반도체와 파운드리(수탁생산)에서 수위를 차지하고 있다.

○노광기가 뭐길래

삼성전자와 인텔, TSMC는 반도체를 만드는 원판인 실리콘 웨이퍼 규격을 키우기 위해 노력해왔다. 2001년부터 업계 표준으로 써온 지름 300㎜ 웨이퍼를 대신해 450㎜ 웨이퍼를 표준 규격으로 삼기로 했다.

동일한 반도체 라인에 300㎜ 웨이퍼를 사용할 때보다 450㎜ 웨이퍼를 쓰면 더 많은 반도체를 양산할 수 있다. 웨이퍼 지름이 1.5배 늘어 넓이에 비례하는 반도체 생산성은 정확히 2.25배 증가한다.

삼성전자와 인텔 등은 생산원가를 절감하기 위해 2008년 웨이퍼 원판을 450㎜로 키우는 데 협력하기로 동맹을 맺었다.

그런데 반도체 장비 업체가 문제였다. 삼성과 같은 반도체 제조기업뿐 아니라 장비업계가 최대 1000억달러가 소요되는 개발 비용을 대는 게 부담스웠기 때문이다.

노광기 1위 업체인 ASML도 천문학적인 투자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삼성 등에 SOS를 쳤고 3개사는 이 요청을 수락했다. 반도체 수요가 줄어들어 노광기 성능을 향상시켜 반도체 생산 비용을 낮춰야 하는 것도 이번 공동 투자의 배경이 됐다.

노광기는 웨이퍼에 회로를 찍어 반도체를 만드는 장비로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이다. 회로를 작고 섬세하게 그리는 게 핵심 기술이다. 도화지에 얇은 연필이나 볼펜으로 그림을 좀 더 세밀하게 그릴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ASML은 다른 업체에 비해 정밀한 기술을 가져 전 세계 70%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반도체 업계에서 내로라하는 삼성전자와 인텔, TSMC가 ASML에 거액을 투자한 이유다.

업계 관계자는 “450㎜ 웨이퍼 공장 하나를 설립하는 데 5조~6조원가량이 들어 반도체 장비뿐 아니라 공장 설립에도 업체끼리 협력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정인설 기자 surisuri@hankyung.com

○ 노광(露光)기
반도체 원재료인 웨이퍼(원형의 실리콘 기판) 위에 회로 패턴이 그려진 틀을 입힌 뒤 빛을 쏘는 역할을 하는 반도체 공정의 핵심장비. 빛을 쏴 회로 패턴 모양대로 웨이퍼 위에 ‘사진’을 찍는 식이다. 노광기 기능이 좋아지면 더 정밀한 패턴을 찍어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