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민뱅크도 울고 갈 '한국형 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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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기업 인증 장벽,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취약계층 고용 30% 등 7가지 요건 모두 충족해야
사회적기업 갈수록 늘지만 정부 의존형 업체로 넘쳐나
< 그라민뱅크 : 노벨상 받은 사회적기업 >
취약계층 고용 30% 등 7가지 요건 모두 충족해야
사회적기업 갈수록 늘지만 정부 의존형 업체로 넘쳐나
< 그라민뱅크 : 노벨상 받은 사회적기업 >
#1. 2010년 설립된 보청기 업체 딜라이트는 최근 국내 사회적기업 인증을 포기하고 미국 ‘소셜 엔터프라이즈(Social Enterprise)’ 인증을 신청했다. 생활이 어려운 난청인들을 위해 200만원짜리 보청기를 무료로 공급하고 있지만 취약계층 30% 이상 채용 등 정부가 제시한 사회적기업 인증 요건을 충족하지 못해서다.
#2. 대구YMCA 산하 조경 사업체인 신천에스파스와 폐자전거 재생 사업체 희망자전거제작소는 몇 년 전 고용노동부에서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았다. 두 회사는 근로자 인건비 등의 명목으로 그동안 총 36억원을 지원받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대구YMCA의 한 간부가 서류를 허위로 작성한 사실이 드러났다. 인증 요건에 맞춰 서류를 위조했다가 적발된 것이다.
사회적기업 인증 요건이 지나치게 까다롭고 획일적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세계 최고의 사회적기업으로 평가받고 있는 그라민뱅크나 티치포아메리카도 한국 기준으로는 인증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1976년 무함마드 유누스 방글라데시 치타공대 교수가 빈민 구제 목적으로 설립, 소액대출 은행의 원조가 된 그라민뱅크는 2006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기업이다. 티치포아메리카는 1990년 미국의 웬디 콥이 빈민층에 대한 교육 목적으로 설립한 대표적인 사회적기업이다.
국내 인증 체계의 가장 큰 걸림돌은 경직적 고용 조건이다. 우선 인증을 받으려면 사회적기업육성법 규정에 따라 △조직 형태 △사회적 목적 실현 △영업활동을 통한 수익 △유급 근로자 고용 △이윤의 사회적 목적 재투자 등의 요건을 모두 충족해야 한다.
특히 일자리 제공형의 경우 전체 근로자 중 취약계층 비율이 30% 이상이어야 하고 사회서비스 제공형은 서비스 수혜자 중 취약계층 비율이 30%를 넘어야 한다. ‘어떤 일을 하느냐’보다 ‘어떤 사람을 채용하느냐’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유급 직원 없이 자원봉사자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한 그라민뱅크나 티치포아메리카는 인증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까다로운 고용조건에 사회적기업 영세해져
사회적기업의 설립 목적은 취약계층 지원 등을 위한 공익 실현이다. 하지만 이 같은 공익사업이 지속성을 갖기 위해선 일정한 수준의 수익사업을 병행해야 한다. 대외 신뢰도 확보와 판로 개척 등을 위해선 ‘사회적기업’이라는 타이틀이 꼭 필요할 때가 있다.
딜라이트의 경우 사회적기업의 일을 하면서도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사업구조를 갖췄다. 무료보청기를 공급하는 것이 회사의 설립 목적이지만 돈을 벌기 위해 고급 보청기를 별도로 만들어 판매하고 수출 시장도 뚫는 등 일반 기업들과도 경쟁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취약계층 고용 비율 등 사회적기업 요건을 충족시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김정현 딜라이트 대표는 “수익이 있어야 회사를 유지할 수 있는데, 수익을 내려면 정부가 요구하는 고용조건을 맞출 수가 없다”며 “사회적기업이 수행하는 활동을 하면서도 정작 사회적기업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다문화가정을 방문해 교육사업을 하고 있는 점프의 경우도 비슷한 이유로 사회적기업 인증을 포기하고 해외 인증을 검토하고 있는 회사다.
울며 겨자 먹기로 억지로 요건을 끼워맞추는 기업들도 있지만 요즘은 딜라이트처럼 해외로 눈을 돌리는 곳도 늘어나고 있다.
정부의 지원 확대로 사회적기업은 해마다 늘어나고 있지만 기업 규모가 갈수록 영세해지고 있는 것도 문제다. 상대적으로 교육 여건이나 경력 등이 뒤처지는 취약층의 고용비율을 높일 경우 새로운 시도보다는 기존 사업을 유지하는 데 급급해지기 때문이다. 홍기택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는 “국내에서는 취약계층 일자리 창출에 너무 초점이 맞춰져 있어 새로운 시도는 하지 않고 정부 지원만 받으려는 업체들이 많다”고 지적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07년 사회적기업육성법이 처음 만들어질 당시 50개에 불과했던 사회적기업은 2008년 208개, 2010년 501개, 2012년 상반기 현재 680개 등 급속하게 늘었다. 사회적기업에 종사하는 근로자 수도 2007년 2539명에서 올 상반기 현재 1만6406명으로 늘어난 상태다. 하지만 사회적기업 회사당 평균 근로자 수는 계속 줄어들고 있다. 2007년 사회적 기업 1개사 평균 근로자 수는 50.7명이었지만 2008년 40.1명으로 줄었고 올 상반기에는 24.1명으로 급감했다. 사회적기업의 규모가 점점 작아지고 있다는 뜻이다. 박오수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사회적기업에 대한 인증체계를 손보지 않으면 영세업체들만 넘쳐나 사회적기업 산업 자체가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 사회적기업
빈곤층, 장애인 등 취약계층의 삶과 고용에 도움을 주는 영업활동을 수행하는 기업. 관련법에 따라 사회적기업으로 인증받으면 정부에서 인건비 및 4대 사회보험료, 법인세·소득세 50% 감면, 시설비 융자 등의 지원을 받는다.
임원기 기자 wonkis@hankyung.com
#2. 대구YMCA 산하 조경 사업체인 신천에스파스와 폐자전거 재생 사업체 희망자전거제작소는 몇 년 전 고용노동부에서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았다. 두 회사는 근로자 인건비 등의 명목으로 그동안 총 36억원을 지원받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대구YMCA의 한 간부가 서류를 허위로 작성한 사실이 드러났다. 인증 요건에 맞춰 서류를 위조했다가 적발된 것이다.
사회적기업 인증 요건이 지나치게 까다롭고 획일적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세계 최고의 사회적기업으로 평가받고 있는 그라민뱅크나 티치포아메리카도 한국 기준으로는 인증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1976년 무함마드 유누스 방글라데시 치타공대 교수가 빈민 구제 목적으로 설립, 소액대출 은행의 원조가 된 그라민뱅크는 2006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기업이다. 티치포아메리카는 1990년 미국의 웬디 콥이 빈민층에 대한 교육 목적으로 설립한 대표적인 사회적기업이다.
국내 인증 체계의 가장 큰 걸림돌은 경직적 고용 조건이다. 우선 인증을 받으려면 사회적기업육성법 규정에 따라 △조직 형태 △사회적 목적 실현 △영업활동을 통한 수익 △유급 근로자 고용 △이윤의 사회적 목적 재투자 등의 요건을 모두 충족해야 한다.
특히 일자리 제공형의 경우 전체 근로자 중 취약계층 비율이 30% 이상이어야 하고 사회서비스 제공형은 서비스 수혜자 중 취약계층 비율이 30%를 넘어야 한다. ‘어떤 일을 하느냐’보다 ‘어떤 사람을 채용하느냐’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유급 직원 없이 자원봉사자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한 그라민뱅크나 티치포아메리카는 인증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까다로운 고용조건에 사회적기업 영세해져
사회적기업의 설립 목적은 취약계층 지원 등을 위한 공익 실현이다. 하지만 이 같은 공익사업이 지속성을 갖기 위해선 일정한 수준의 수익사업을 병행해야 한다. 대외 신뢰도 확보와 판로 개척 등을 위해선 ‘사회적기업’이라는 타이틀이 꼭 필요할 때가 있다.
딜라이트의 경우 사회적기업의 일을 하면서도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사업구조를 갖췄다. 무료보청기를 공급하는 것이 회사의 설립 목적이지만 돈을 벌기 위해 고급 보청기를 별도로 만들어 판매하고 수출 시장도 뚫는 등 일반 기업들과도 경쟁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취약계층 고용 비율 등 사회적기업 요건을 충족시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김정현 딜라이트 대표는 “수익이 있어야 회사를 유지할 수 있는데, 수익을 내려면 정부가 요구하는 고용조건을 맞출 수가 없다”며 “사회적기업이 수행하는 활동을 하면서도 정작 사회적기업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다문화가정을 방문해 교육사업을 하고 있는 점프의 경우도 비슷한 이유로 사회적기업 인증을 포기하고 해외 인증을 검토하고 있는 회사다.
울며 겨자 먹기로 억지로 요건을 끼워맞추는 기업들도 있지만 요즘은 딜라이트처럼 해외로 눈을 돌리는 곳도 늘어나고 있다.
정부의 지원 확대로 사회적기업은 해마다 늘어나고 있지만 기업 규모가 갈수록 영세해지고 있는 것도 문제다. 상대적으로 교육 여건이나 경력 등이 뒤처지는 취약층의 고용비율을 높일 경우 새로운 시도보다는 기존 사업을 유지하는 데 급급해지기 때문이다. 홍기택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는 “국내에서는 취약계층 일자리 창출에 너무 초점이 맞춰져 있어 새로운 시도는 하지 않고 정부 지원만 받으려는 업체들이 많다”고 지적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07년 사회적기업육성법이 처음 만들어질 당시 50개에 불과했던 사회적기업은 2008년 208개, 2010년 501개, 2012년 상반기 현재 680개 등 급속하게 늘었다. 사회적기업에 종사하는 근로자 수도 2007년 2539명에서 올 상반기 현재 1만6406명으로 늘어난 상태다. 하지만 사회적기업 회사당 평균 근로자 수는 계속 줄어들고 있다. 2007년 사회적 기업 1개사 평균 근로자 수는 50.7명이었지만 2008년 40.1명으로 줄었고 올 상반기에는 24.1명으로 급감했다. 사회적기업의 규모가 점점 작아지고 있다는 뜻이다. 박오수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사회적기업에 대한 인증체계를 손보지 않으면 영세업체들만 넘쳐나 사회적기업 산업 자체가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 사회적기업
빈곤층, 장애인 등 취약계층의 삶과 고용에 도움을 주는 영업활동을 수행하는 기업. 관련법에 따라 사회적기업으로 인증받으면 정부에서 인건비 및 4대 사회보험료, 법인세·소득세 50% 감면, 시설비 융자 등의 지원을 받는다.
임원기 기자 wonk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