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현대건설이 1976년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 입찰에 참여한다고 했을 때 브라운앤드루트, 산타페 등 선진국 건설사들은 코웃음을 쳤다. 낯선 나라에서 온 건설사가 당시 단일 공사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던 주베일 공사를 따겠다고 했으니 비웃음을 보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현대건설의 인지도는 턱없이 낮았고 어려운 철구조물 제작과 시공 경험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단호했다. “시공 경험이 없는 분야라고 못한다면 현대가 어떻게 조선소도 없는 상태에서 26만t급 유조선을 수주해 건조했겠느냐”며 직원들을 독려했으며, 9억3114만달러라는 파격적인 입찰가격에 공사기간을 8개월 단축시키겠다고 제의해 세계 유수 회사들을 제치고 입찰을 따냈다. 외환은행이 건국 이후 최고의 외환보유액을 갖게 되는 순간이었다.

《정주영 희망을 경영하다》는 정 회장을 곁에서 보필했던 사람들이 추억하는 그의 이야기를 담은 것. 현대그룹 성장기에 정 회장과 18년간 동고동락했던 저자가 자신의 경험에다 함께 일했던 선후배들의 기억을 보태 썼다.

이 책에는 소양강댐, 울산조선소 건설, 천수만 물막이 공사 등 지금은 너무나 유명해진 이야기도 포함됐지만 그의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소소한 에피소드도 들어 있다.

여섯 장에 담긴 에피소드를 좇다보면 대한민국 경제사가 보이고 인간 정주영의 윤곽을 어렴풋하게 느끼게 된다.

특히 “정 회장은 문어발처럼 사업을 확장하거나 중소기업, 소상공인의 영역을 넘보지 않았다”는 정해균 전 현대중공업 전무의 회고가 의미 있게 다가온다. ‘독수리는 결코 파리를 잡지 않는다’는 서양 속담처럼 “그 업종이 좋으면 창업을 하는 한이 있어도 남의 것을 헐값으로 인수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며 기업 합병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협상 테이블에서 묘하게 상대의 마음을 흔드는 ‘정주영식 화법’도 눈길이 간다. 그는 1989년 북방 경제사업 진출을 구상하기 위해 당시 소련의 최고 실력자인 프리마코프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그는 “나는 한국에서 온 프롤레타리아”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부르주아 중에서도 최상류 부르주아였던 그는 왜 자신을 노동자라고 소개했을까.

정 회장의 대답이 가관이다. “나는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노동으로 돈을 벌었고 기업을 일으켜 이제는 돈이 많긴 하지만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번 ‘부유한 노동자’일 뿐이다.”

첫인사를 나눈 순간부터 재벌총수 이미지를 깬 그는 이 회동을 밑거름으로 러시아와 다양한 경제 협상을 하게 된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해내는 법이다. 의심하면 의심하는 정도밖에 못하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할 수 없는 것이다.”

김인선 기자 indd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