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보 다리 아래로 센강이 흐른다 / 우리 사랑을 / 나는 다시 되새겨야만 하나 / 기쁨은 언제나 슬픔 뒤에 왔지 // 밤은 찾아오고 종소리는 시간을 알리네 / 그렇게 세월은 흘러가지만 나는 (여전히 다리 아래) 머물러 있네.’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1880~1918)는 1912년 ‘파리의 야회’지(誌) 2월호에 ‘미라보 다리’를 발표했다. 5년간 뜨겁게 사랑을 불태웠던 화가 마리 로랑생(1885~1956)과의 결별을 아쉬워하는 시인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아폴리네르가 로랑생을 처음 만난 것은 1907년 피카소가 거처하던 몽마르트르언덕의 ‘바토 라부아르’에서였다.

아폴리네르는 아름답고 쾌활한 로랑생에게 첫눈에 반했다. 그는 특유의 총명함으로 입체파 화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은 몽마르트르의 뮤즈였다. 아폴리네르는 촌스럽게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지만 로랑생도 실험정신으로 가득한 젊은 시인에게 호감을 가졌다. 둘은 빠르게 가까워져 서로의 예술에 대한 충성스러운 찬미자가 됐다. 사생아였던 로랑생은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몽마르트르 근처 샤펠가에 살고 있었다. 얼마 후 로랑생이 센강 서쪽, 불로뉴숲 부근의 오퇴유로 이사를 가자 아폴리네르는 그와 자주 만나기 위해 1909년 1월 자신도 오퇴유로 거처를 옮긴다. 둘은 함께 시내로 외출하고 돌아올 때마다 손을 맞잡고 미라보다리를 건넜다.

그러나 오퇴유로 이사한 후부터 둘은 자주 다투게 된다. 로랑생은 빨리 결혼하기를 바랐지만 한창 ‘미학적 성찰-입체파 화가들’이라는 평론집을 준비하고 있던 아폴리네르는 결혼을 자꾸 미루려 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로랑생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고 두 사람의 감정의 골은 갈수록 깊어졌다. 로랑생은 더 이상 아폴리네르를 만나려 하지 않았고 결국 1912년 6월 결별을 선언했다.

‘미라보 다리’가 로랑생의 결별선언보다 넉 달 일찍 나온 것은 아폴리네르가 이미 로랑생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이 시에서 아폴리네르는 미라보다리 아래서 센강을 바라보며 강물처럼 흘러가버린 사랑을 아쉬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네 차례에 걸쳐 반복적으로 묘사했다. 1913년 발간한 시집 ‘알코올’에서는 ‘미라보 다리’와 함께 ‘마리’ ‘변두리’ ‘사냥의 뿔 나팔’을 로랑생과의 추억에 바쳤다.

결별 후 로랑생은 1914년 판화가인 오토 폰 바예첸 남작과 결혼했고 한동안 정신적 공황에 빠졌던 아폴리네르는 1914년 1차대전 발발과 함께 자원입대서를 제출했다. 소집명령을 기다리던 그는 지인과 함께 니스의 한 문인 모임에 갔다가 루이즈 드 콜리니샤티용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백작의 작위를 물려받은 이 바람둥이 이혼녀는 자신의 정부가 전쟁터에 나가 있는 동안 그 무료함을 달래줄 남자가 필요했다. 아폴리네르는 그것도 모른 채 이 여인에게 모든 것을 바쳤지만 여인은 그저 자신에게 목을 매는 젊은 시인의 헌사와 열정을 즐길 뿐이었다. 그렇지만 로랑생의 사랑을 잃은 아폴리네르는 누구든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해 12월 입대한 아폴리네르는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문학교사 마들렌 파제와 서신교환 끝에 약혼에 이른다. 그러나 결혼까지 이어지지는 못한다. ‘내가 좋아하는 유일한 포탄은 그대의 젖가슴’이라는 유명한 시구는 전장에서 마들렌을 그리며 쓴 것이다. 1915년 12월 그는 최전방인 샹파뉴에 배치됐다. 안타깝게도 그의 앞에는 운명의 여신이 짙은 불운의 장막을 드리우고 있었다. 1916년 3월17일 참호 속에서 자신의 글이 실린 잡지를 읽던 아폴리네르는 갑자기 날아든 포탄 파편이 관자놀이에 박히는 중상을 입는다. 파리로 후송돼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쳤지만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아직은 불편한 몸이었지만 아폴리네르는 다시 의욕적으로 문필활동을 재개했다. 그는 초현실주의, 다다, 미래주의 등 전위적 예술운동에 영감을 불어넣는 한편 시집 ‘칼리그람’, 소설집 ‘살해당한 시인’ 등을 발표, 문단의 리더로 떠오른다. 그러나 전장의 상처로 쇠약해진 몸은 스페인독감 바이러스를 이겨내지 못했다. 1918년 11월 그는 발병 5일 만에 숨을 거둔다. 화가 자클린 콜브와 결혼한 지 6개월밖에 안 된 상태였다.

한편 로랑생은 판화가 바예첸과의 관계가 순탄치 못해 7년 만에 갈라선 후 파리로 돌아와 그후 삽화가로, 무대미술가로 크게 성공한다. 그 역시 아폴리네르처럼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여자였다. 그는 늘 저명 문인예술가와 스캔들을 뿌려 비판의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아폴리네르를 대신할 수는 없었다. 1956년 그는 세상을 뜨기 전 자신이 죽으면 하얀 드레스를 입혀주고 한 손에는 장미, 다른 한 손에는 아폴리네르의 시집을 놓아달라고 유언했다. 하얀 드레스는 결혼의 상징이고, 장미와 시집은 저 세상에서나마 아폴리네르와 이루지 못한 사랑을 다시 시작하려는 염원을 담은 것이었다.

로랑생은 지금쯤 미라보다리 아래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아폴리네르를 만나고 있을지 모른다. 그는 여전히 그곳에 머물러 떠나간 사랑이 되돌아오길 기다고 있을 테니 말이다. ‘밤은 찾아오고 종소리는 시간을 알리네 / 그렇게 세월은 흘러가지만 나는 (여전히 다리 아래) 머물러 있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