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 파탈에 빠진 말러…사랑의 기쁨과 슬픔 선율에 녹이다
1901년 11월7일 저녁 빈 궁정 오페라단 단장인 구스타프 말러(1860~1911)는 한 문학 살롱에서 운명의 여인을 만났다. 여성 작가인 베르타 주커칸들이 주도하는 모임이었다. 백옥같이 하얀 마스크에 흑발의 이 매력적인 여인은 오스트리아의 저명 풍경화가 에밀 자콥 신들러의 딸, 알마(1879~1964)였다. 알마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소질을 보여 일찍부터 피아노를 쳤고 9살 때 벌써 작곡에 손을 댔다고 한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뜨자 알마의 어머니는 오래 전부터 은밀히 관계를 가져온 남편의 제자 카를 몰과 결혼했는데 계부인 몰은 전통미술에 반기를 든 빈 분리파의 주도적 인물이었다. 몰은 빈의 명사들을 자주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였는데 그로 인해 알마는 사춘기 때부터 빈의 명사들을 지척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덕분에 알마의 미모는 일찍부터 명사들의 입소문을 타고 빈에 파다하게 퍼졌다.

화가 클림트는 몰의 집을 드나들다 이 절세의 17세 소녀와 잠깐이지만 불같은 사랑을 나눴다. 내향적이고 대인기피증이 심한 클림트였지만 미인을 유혹하는 데는 정평이 나 있었다. 둘의 관계는 사전에 몰에게 발각돼 미완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클림트 외에도 수많은 남자들이 이 매력적인 처녀의 사랑을 얻으려 끊임없이 주변을 맴돌았다.

말러도 살롱에서 이 여인을 처음 본 순간 저항할 수 없는 열정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일에만 열중하느라 혼기를 놓친 이 41세의 골드미스터는 이제 그만 독신 생활을 접고 자기와 평생을 함께 할 동반자를 찾고 있던 중이었다. 그 때 마침 알마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모임 내내 입도 뻥긋하지 않은 채 알마의 얼굴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목석같은 노총각의 가슴에 사랑의 열병이 번진 것이다.

그 후부터 잠을 이루지 못한 말러는 마침내 11월28일 알마에게 정식으로 청혼했다. 이 사실을 안 알마의 집안에서는 난리가 났다. 딸보다 19살이나 많은 41세의 ‘늙은 신랑’은 절대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오페라 무대에 서려는 미모의 가수 지망생들이 말러 주변에서 갖가지 염문을 뿌리고 있었고 심지어 말러가 불치의 몹쓸 병에 걸렸다는 악의적인 소문까지 나돌았다. 알마로서도 이 중년의 남자가 탐탁지 않았다. 말러는 청혼한 뒤 3주일 후인 12월19일 자신의 결혼관을 피력한 20장짜리 장문의 편지를 알마 앞으로 보냈다. 자기의 부인은 자기와 같은 일을 해서는 안 되고 오직 가사에 전념하면서 자신의 음악이 꽃피울 수 있게끔 도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비위를 맞춰도 시원찮을 판에 자기 주장만 펴는 이 노총각의 주제 넘은 태도에 알마는 적잖이 실망했다. 그러나 알마의 결정은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듬해 3월 그는 말러의 안방마님이 됐기 때문이다. 알마는 어쩌면 일생에 단 한 번뿐인 기회가 될지도 모르는 빈 최고의 문화계 거물의 부인이라는 타이틀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말러가 이 때 작곡한 교향곡 제5번 4악장 ‘아다지에토’를 알마에게 헌정한 것이 이 앳된 신부를 감동시켰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혼과 함께 알마의 인생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말러는 일밖에 모르는 위인이었다. 알마는 점점 가정부가 된 기분에 빠져들었다. 그런 가운데 1907년 큰 딸 안나 마리가 디프테리아로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는 걷잡을 수 없는 정신적 공황상태로 빠져들었다. 말러는 알마가 받았을 정신적 충격을 도닥여주기 위해 그간 자신이 가로막았던 작곡 활동을 재개하도록 배려했고 교항곡 제8번을 알마에게 헌정했다.

알마가 젊은 건축가로 훗날 바우하우스 운동의 주역이 된 발터 그로피우스와 은밀히 사랑을 속삭이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러나 둘 사이의 관계는 그로피우스가 알마에게 보내는 편지의 주소를 말러 앞으로 잘못 쓰는 바람에 탄로나고 만다. 당시 말러는 심장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상태였다. 불치병에 사랑마저 잃은 말러는 절규했다.

1911년 5월18일 뉴욕 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말러는 빈에서 숨을 거뒀다. 말러의 재산을 물려받은 알마는 돈 많은 유한 마담이 됐다. 그는 빈의 이단적 화가였던 오스카 코코슈카와 광란적인 사랑에 빠져들었지만 그의 광기를 감당할 수 없음을 알고 관계를 정리한다. 절망한 화가는 알마와 똑같은 크기의 인형을 주문, 함께 생활하며 실연의 아픔을 달랬다고 한다. 그가 그린 명작 ‘바람의 신부’는 알마와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담은 것이다. 이후 알마는 1920년 그로피우스와 결혼했다가 1920년 이혼했고, 그로피우스와의 부부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때 만난 젊은 시인 프란츠 베르펠과 1919년부터 딴살림을 차리고 살다 1929년 뒤늦게 결혼했다. 그러나 이건 대표적인 사례일 뿐 알마의 남자리스트는 노트 한 권이 부족할 정도다. 수많은 빈의 명사들이 하나같이 알마 앞에서 사랑의 노예가 됐다. 그녀는 팜 파탈의 전형이었던 것이다.

알마는 애초에 말러가 감당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탁월한 외모를 이용, 명사들을 자신의 남자로 삼고야 마는 과시적이고 명예욕이 강한 여성이었음에 틀림없다. 분명한 것은 그의 치명적 아름다움이 ‘그의 남자들’에게 창작욕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다. 그의 사랑을 잃은 말러는 비탄 속에 마지막 작품이 된 교향곡 제10번을 써내려갔다. 악보 마지막 페이지 여백에 남긴 그의 문구에서 처연한 눈물이 흐른다. 그것은 그가 악보 위에 남긴 유언장이었다. “안녕, 안녕, 나의 리라(그리스의 현악기)…알마, 당신을 위해 살고 당신을 위해 죽으리.”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