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은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이른바 '둘 낳기 운동'을 시작한 해다.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표어를 채택하고 이를 전국 방방곡곡에 홍보하며 표준적 자녀 수를 두명으로 줄이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둘 낳기'라는 목표는 아들을 낳기 위해 계속 출산하는 경향을 고치지 않고서는 달성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에 1974년부터는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말이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일상생활의 일부가 됐다.

당시 국가는 방영되는 모든 TV드라마에 등장하는 부부를 두 명 이하의 자녀를 가진 것으로 묘사하게 하는 조치를 취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197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개인들의 출산에 대한 동기와 태도에 주목해 자발적인 출산억제 욕구를 유발할 수 있도록 사회변화를 유도하는 정책이 개입된다.

이로인해 의사들과 경제 관료들에 주도된 가족계획사업은 출산억제 효과에만 초점을 맞추게 된다.

1960년대 주력한 피임 수단이 자궁내장치인 리페스 루프와 먹는 피임약이었다면 1970년대에는 먹는 피임약 보급에 더하여 불임수술의 시술이 중요한 사업의 목표가 된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여성의 불임시술인 난관수술은 개복을 해야할 정도로 큰 수술이었다. 그러나 대대적인 정관수술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수술을 받는 남성은 늘어나지 않았다. 남성들은 이것을 '거세 수술'이라 여기거나 정력 감퇴 등을 우려해 기피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불임수술을 받은 남성들은 대부분 예비군 훈련시의 혜택을 이용한 경우였다.

가족계획사업이 지나치게 여성만을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에 대해 1970년대의 여성 국회의원들은 성차별적이라며 비난하기도 했다. 이런 문제가 제기되자 1975년 여성단체는 대한가족계획협회와 손잡고 '남성이 더 피임하는 해'를 선포햇지만 바로 다음해 여성 복강경 불임시술법이 가능해지자 곧바로 시들해졌다.

1970년대 피임법 어땠나
이같은 난관수술은 '배꼽수술'이라 불리며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졌다. 여전히 정관수술보다 더 크고 어려운 수술이었는데도 말이다.

이는 피임 문제가 일차적으로 여성의 몸에 결부된 것이어서 여성들이 더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남자 몸에 칼 대게 하느니 여자가 하지"와 같은 가부장적 통념이 끼친 영향도 상당했다.

1977년 2자녀 불임시술자에게 민영 공공주택 입주권을 부여했을 때 내집마련을 위해 임신된 아이를 인공유산하고 불임수술을 받은 뒤 분양신청서를 제출해 아파트에 당첨된 사례도 있었다.

가족계획사업 시기를 거치면서 한국 여성들은 자신의 출산력을 자기 의지대로 조절하고 가족의 경제적 기획자로 등장하게 됐다.

이런 가족계획을 벌이던 우리나라가 2000년대 중반으로 가면서 국가가 정책적으로 출산율 증가를 유도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저출산 고령화사회가 현실화될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저출산은 전반적인 만혼 현상과도 연계되어 있지만 경제위기와 맞물린 여성들의 출산회피와 맞물린 현상이다. 근본적으로 여성들의 삶에서 어머니노릇이 부과하는 부담을 덜어주지 않고는 해결하기 어려울 것이다. < 자료제공 = 서울대 여성연구소 '현대 한국의 인간 재생산'(시간여행 출판) >

한경닷컴 이미나 기자 help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