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병신춤’으로 알려진 ‘1인 창무극’의 대가 공옥진 여사가 9일 오전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79세. 고인은 1998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투병 중이었다.

1933년 전남 영광에서 판소리 명창 공대일의 4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고인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서 창을 배웠다. 열 살 무렵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 고인은 무용가 최승희의 집에서 하녀로 일하며 춤을 익혔다. 6·25전쟁 중에는 경찰관의 아내로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으며 속세와 인연을 끊고 불교에 귀의했다가 환속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고인은 1945년 조선창극단에 입단하면서 무용가의 길로 들어섰다. 1960년대엔 임방울 창극단, 김연수 우리악극단, 박녹주 국극협회 등 여러 국악단체에서 활동했다. 이후 10여년간 영광에서 농사를 짓다가 1978년 서울 ‘공간사랑’ 개관 기념공연에서 전통 무용에 해학적인 동물 춤을 접목한 ‘1인 창무극’을 선보이며 주목받았다.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링컨센터에서 단독 공연을 했고 일본 영국 등의 공연을 통해 한국의 서민 예술을 외국에 선보였다. 독특한 형식의 춤으로 해외에서 가장 한국적인 예술로 극찬을 받았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무형문화재 신청 뒤 이를 인정받는 데만 12년 이상이 걸렸다. 1998년 무형문화재 지정을 신청했지만, 전라남도 문화재위원회는 ‘전통을 계승한 것이 아닌 본인이 창작한 작품’이라는 이유로 지정을 거부했다. 이후 제자들도 하나둘 그의 곁을 떠났고 세간의 무관심은 생활고로 이어졌다. 1998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고인은 2004년 투병 중 공연을 마치고 나오다 또다시 쓰러져 몸 왼쪽이 마비됐다. 2007년부터는 국민기초생활수급자에게 매달 주어지는 43만원의 지원금으로 힘겹게 생활했지만, 춤을 향한 열정만은 식지 않았다.

2010년 5월 마침내 ‘판소리 1인 창무극’ 중 심청가가 전라남도 무형무화재로 지정 예고됐고 그해 11월 최종 인정됐다. 지정 예고 한 달 뒤 ‘한국의 명인명무전’으로 국립극장 무대에 오른 고인은 “맺히고 맺힌 한을 풀었다. 이젠 죽어도 원이 없다”며 생애 마지막 무대를 선보였다.

빈소에는 고인의 문하생과 지역 문화계 인사 등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1인 창무극’의 유일한 전수자인 한현선 씨(47)는 “선생님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가끔 전수관을 찾아 문하생들을 지도하는 등 열정을 보이셨다”며 “마지막도 함박꽃처럼 예쁘게 가셨다”고 말했다. 윤진철 광주시립국극단장은 “(고인의 공로에 비해) 제대로 된 대접도 받지 못하고 굴곡진 삶을 살다 가셨다”며 “고인에 대한 재조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고인에 대한 문화훈장 추서를 행정안전부와 협의 중이다.

고인은 걸그룹 2NE1의 멤버 공민지 양의 고모할머니로 잘 알려져 있다. 공양은 “할머니의 영향으로 평소 한국 전통문화에 관심이 많다”며 고인에 대한 존경을 표현해왔다. 유족으로는 딸 김은희 씨(63)와 손녀 김형진 씨(40)가 있다. 빈소는 영광 농협장례식장 2호실. 장례는 영광문화원 주관으로 문화인장으로 치러지며 발인은 12일 오전 10시, 장지는 무등산 문빈정사다.

백승현 기자 arg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