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민주화를 놓고 정치권의 논쟁이 뜨겁다. 그 내용도 불분명하다. 경제민주화의 이념적 고향은 유럽 국가다. 원래 그것은 20세기 초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고 그 이념가들과 경쟁했던 번슈타인과 나프탈리 등이 주창한 사회민주주의의 핵심 요체였다.

경제민주화 논리는 정치에서 모두에게 평등한 권리 행사를 가능하게 하는 민주주의가 실현됐지만 중소상공인과 노동자들에 대해 대기업이 ‘전횡’하고 있기에 이를 막기 위해서 경제에서도 민주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것을 막지 않고 오히려 인정하는 자유시장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는 것, 부유한 소수에서 권력을 빼내 국민에게 나눠줘야 한다는 것, 이것이 경제민주화의 핵심 철학이다.

흥미롭게도 경제민주화가 본격적으로 논의됐던 시기는 유럽사회가 좌경화됐던 1970년대였다. 쟁점의 압권은 기업의 경영권을 빼앗아 노동자들에게 나눠주는 노동자 경영참여제도다. 그러나 이는 두고두고 기업경영의 발목을 잡아 독일 기업의 경쟁력을 악화시킨 주범이 됐다. 1970년대 영국과 독일이 실시했지만 그들의 경제를 망가뜨리고 사라진 ‘협조적 행위(concerted action)’도 빼놓을 수 없다. 이는 기업의 투자나 기업의 사업 분야, 물가정책 등 거시적 조정과 관련된 정책 결정에 노동조합과 기업의 대표들이 참여하는 제도다.

그 밖에도 해고금지법 등 경제 민주화로 포장된 친(親)노동정책이 주였는데, 우리나라 정치권이 경쟁적으로 쏟아내는 정책들을 보면 경제민주화가 주로 재벌·부자 때리기로 둔갑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유럽의 경제민주화론과 공통된 믿음은 자유시장을 민주적으로 선출된 입법자나 정부의 조종과 통제의 대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민주화는 복잡하고 섬세한 기업의 경제활동을 정치화하자는 뜻이다. 이런 식으로 경제자유를 유린하는 것은 경제민주화의 치명적 오류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경제자유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미국의 유명한 싱크탱크인 헤리티지 재단의 ‘세계경제자유지수 연구’가 확실하게 보여준다. 정부권력이 작아져 시민들의 경제 자유가 커질수록 고용과 소득도 증가한다. 그러나 소비자들의 자유는 물론이요 그들이 키워놓은 대기업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위축시키는 경제민주화는 필연적으로 기업가 정신을 훼손하고 투자 의욕을 감퇴시켜 경제 활력을 떨어뜨린다. 그 결과는 처절하다. 실업은 늘고 소득은 줄며, 저소득층의 밥그릇이 깨지는 등 민생이 피폐해진다.

경제자유가 중요한 이유는 또 있다. 하이에크가 강조하듯이, 시장의 자유는 사상·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 정신적 자유의 보루(堡壘)일 뿐만 아니라 민주발전의 선결조건이다. 자유시장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부합할 수 없다는 경제민주화론은 그래서 옳지 않다. 오히려 경제민주화가 정치민주화와 양립할 수 없다. 경제민주화로 정부권력이 커지면 편가르기의 불공정한 정치적 과정이 불가피하다. 엄정해야 할 정치과정이 ‘지대추구’의 장(場)으로 변질되고 이로써 사회적 불신은 깊어져 갈등과 분열은 증폭하게 마련이다. 이는 민주발전을 심각하게 훼손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재벌의 경제력이 국가권력을 누르기 때문에 재벌개혁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터무니없다. 시장경제의 원칙에서 벗어난 국가권력에 대해 기업들이 맞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대기업들로 하여금 마음 놓고 자신의 경제력을 소비자들을 위해서 전부 쏟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경제민주화가 아니라 자유시장이다.

그러나 경제민주화 논의가 새삼스럽게 뜨겁지만, 지금까지도 우리나라 정부는 대기업에 대한 여러 규제와 조정을 해온 게 사실이다. 수도권 규제를 비롯해 공정거래법에 의한 대기업 규제는 어처구니없게도 세계 1위를 차지할 것이다. 여기에다 경제민주화의 명분으로 규제 덩어리를 새로 도입하는 건 위험천만하다.

그래서 경제민주화 대신 자유시장 친화적으로 규제를 개혁하는 ‘경제자유화’가 옳은 이념이다. 자유로운 시장사회만이 경제적 번영은 물론이요 민주정치 발전을 위한 최선의 길이기 때문이다.

민경국 < 강원대 교수·경제학, 한국제도경제학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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