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인 최초로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에 입성하고 유럽 최고의 무대인 비엔나국립극장을 정복한 바리톤 서정학 씨(42).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유도 3단의 만능 스포츠맨이며, 엔진의 울림을 좋아해 자동차와 오토바이에 빠져 사는 화끈한 남자다. 최근 영화 ‘여인의 향기’와 ‘파리넬리’의 주제가, 오페라 ‘돈 지오반니’ 등 10곡의 성악곡으로 솔로 앨범 ‘로만자(Romanza)’를 발표한 그를 서울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대학 2학년 때 홀로 미국에 건너 갔어요. 그땐 막막하기만 했는데 하루 8시간 넘게 연습하면서 성실하게 승부했죠. 그렇게 5년 만에 세계 굴지의 매니지먼트사 CAMI(콜롬비아아티스트매니지먼트)와 계약했어요. 첫 개런티가 5000달러였는데 그 다음 해에 1만달러로 뛰더라고요.”
그는 미국에 건너간 해 샌프란시스코 오페라단 오디션에 통과했다. 마리오란차 국제콩쿠르 1위를 시작으로 10여개의 국제콩쿠르에서 수상하며 이름을 알렸다. 1996년 동양인 최초로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의 메롤라 그랜드 파이널에서 최고상을 거머쥐었다. 당시 2위 수상자는 현재 최고의 디바로 활약하고 있는 안나 네트렙코다. 그는 그해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콩쿠르까지 점령하면서 국제 무대에서 크게 주목받았다. 소프라노 홍혜경 조수미 신영옥에 이어 한국 남자 성악가 최초로 97~98시즌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무대에 데뷔했다. 제임스 러바인, 발레리 게르기예프, 줄리어스 루델, 카를로 리치, 넬로 산티, 도널드 러니클 등 세계적 거장과 무대를 만들었다.
그의 음악생활은 우연히 시작됐다. 고교 3학년 때, 서울대 경제학과에 다니던 친한 형을 따라 학교에 자주 드나들다 성악과 건물 앞을 지나간 게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성악과 학생들이 연습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왠지 그냥 내가 불러도 그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은 거만한 생각이 들었어요. 노래를 배운 적은 없었지만 부모님을 닮아 목소리는 타고 났었거든요.”
굴지의 사업가였던 아버지와 그 사업을 물려받은 형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다. 입시 3개월 전부터 시작한 성악으로 서울대 음대에 덜컥 합격하자 그는 오토바이 한 대와 배낭 하나만 들고 집을 나왔다.
“아버지와 다시 대화를 나누게 된 게 4~5년밖에 안됩니다. 마음은 아팠지만 뭔가 보여주려고 더 열심히 했죠.”
불행은 갑자기 찾아왔다. 중소기업 최고경영자(CEO)였던 형이 2004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까지 병환을 얻자 집안의 빚이 크게 늘었다. 귀국해서 돈벌이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할 줄 아는 게 노래밖에 없으니 잠 한두 시간씩 자면서 레슨하고, 제 개인적인 생활은 다 접었어요. 몇 년 전에 그 빚을 다 갚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려니까 아버지가 “미안하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1년에 40회 이상 공연을 펼쳤다. 공연을 하다보니 이름을 걸고 무언가 남기고 싶었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미루고 미뤘던 앨범 발매의 꿈을 올초 이뤘다. 그는 오는 9월 ‘오페라를 노래하는 남자’라는 제목의 앨범 발매 기념 콘서트도 연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