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안진 시인 "세상 각박할수록 너그러운 모성의 언어가 필요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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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번째 시집 '걸어서 에덴까지' 출간
1주일에 한편씩 쓰고 천문·지질·역사 공부 몰입
이솝우화 같은 시 쓰고 싶어
1주일에 한편씩 쓰고 천문·지질·역사 공부 몰입
이솝우화 같은 시 쓰고 싶어
검정과 밝음, 밤과 낮, 음과 양…. 빛을 포함한 후자가 평화로운 세계일 것 같지만 유안진 시인(71)에게는 반대다. 그에게 검정(玄)은 단순한 ‘색깔’의 개념이 아니다. 깊고 광활한 태초의 세계다. 무슨 색을 받아들여도 얼룩이 남지 않는 넓은 천연색. 밤은 평화롭고 휴식할 수 있는 시간인 반면 낮은 긴장과 싸움의 시간이다. 어두운 ‘음’은 모성, 즉 돌아가고 돌아가도 결국 우리가 시작해야 할 ‘태초’의 세계다. 우리는 밤에서 휴식하며 ‘음’에서 태어났다. 이른바 ‘검은 평화’다.
그의 열여섯 번째 시집 《걸어서 에덴까지》(문예중앙)는 그런 의미에서 ‘검은 시집’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지막한 목소리로 어둠을 이야기하지만 이것이 절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외려 인간이 돌아가야 할 태초의 ‘검은 평화’를 말하며 치유를 꿈꾼다.
‘검어진다는 것은 넘어선다는 것/높이를 거꾸로 가늠하게 된다는 것/창세전의 카오스로 천현(天玄)으로/흡수되어 용해되어버린다는 것//(중략)//버림받은 찌꺼기들 품어 안는 칠흑 슬픔/바닥 모를 용서의 깊이로 가라앉아/쿤타 킨테에서 버락 오바마까지의/검은 혁명을 음미해보자/암흑보다 깊은 한밤중이 되어서.’(‘대낮이 어찌 한밤의 깊이를 헤아리겠느냐’ 부분)
시집에는 ‘성모님’ ‘보살’과 같은 종교적 시어도 자주 등장한다.
“보살과 성모 마리아는 모두 여성이지요. 하느님은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어머니도 포함하는 존재입니다. 무조건적인 모성의 용서가 현재 우리 사회와 삶에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시를 썼습니다.”
각박한 현실 속의 우리에게 먹먹한 통찰을 주는 시들도 많다.
‘풀밭에 떼 지어 핀 꽃다지들/꽃다지는 꽃다지라서 충분하듯이/나도 나라는 까닭만으로 가장 멋지고 싶네//시간이 자라 세월이 되는 동안/산수는 자라 미적분이 되고/학교의 수재는 사회의 둔재로 자라고/돼지 저금통은 마이너스 통장으로 자랐네//일상은 생활로, 생활도 삶으로 자라더니/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네/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기 위해서/그렇게도 오랜 공부가 필요했네’(‘공부’ 부분)
그는 “정답이 없는 것이 인생인데도 무엇이든 ‘쓸모’가 있어야만 하는 사회가 허무함을 만든다”고 했다. 쓸모 없어 보이는 존재라도 그 자체로 소중하다는 것이다.
그는 요즘도 1주일에 한 편씩 시를 써 합평모임에 나가고 격주로는 천문학, 지질학, 역사학 강의를 듣는다. 시세계를 넓히기 위해서다. 서울대 교수로 정년퇴직한 지 6년째, 일흔이 넘은 나이지만 그의 시가 힘을 잃지 않는 이유다. 그의 시와 수필은 교과서에도 15편이나 수록돼 있다.
이번 시집은 자신에게도 “태초로 돌아가는 치유의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그만큼 각별한 시집이라는 것이다.
“불행은 원하는 만큼 쓰지 못하는 것이고, 죽음은 더 이상 시를 못 쓰는 것이지요. 정신없이 살다가 허둥지둥 죽고 싶지 않은데도 원하는 대로 써지지 않아 늘 불행해요. 다음 시집에는 이솝우화처럼 구체적인 이야기를 빌려 말하는 ‘알레고리가 있는 시’를 담고 싶습니다.”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