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산책] 퇴계 이황의 따스한 포용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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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름지기 좋은 학자 되려면 '사람 사랑하는 마음' 있어야
이상하 < 고전번역교육원 교수 >
이상하 < 고전번역교육원 교수 >
‘적벽부(赤壁賦)’의 시인 소동파(蘇東坡)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우리나라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중국 인물로 문학에는 소동파, 사상에는 주자(朱子)를 꼽아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주자가 가장 배격했던 인물이 바로 소동파다. 주자는 소동파의 사상과 문학이 학자들에게 큰 해독을 끼친다고 생각해 혹독하게 비판했다.
퇴계는 주자를 가장 충실히 배운 학자이지만 소동파에 대한 견해만큼은 다르다. 퇴계와 주자의 성향 차이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이덕홍(李德弘·541~1596)의 《계산기선록(溪山記善錄)》에 이런 글이 실려 있다.
‘신유년(1561) 4월15일에 선생이 조카 교, 손자 안도 및 덕홍과 더불어 달밤에 탁영담에 배를 띄워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서 반타석에 배를 정박했다가 역탄에 이르러 닻줄을 풀고 배에서 내렸다. 세 순배 술을 마신 다음 선생이 옷깃을 바루고 단정히 앉아 마음을 고요히 가다듬고 한참 동안 가만히 계시더니 ‘전적벽부(前赤壁賦)’를 읊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소공(蘇公)이 비록 병통은 없진 않지만 그 마음에 욕심이 없었음은 ‘진실로 나의 소유가 아니면 비록 털끝만 한 것도 취하지 않는다’ 이하의 구절에서 알 수 있다. 또 귀양 갈 때 관(棺)을 싣고 갔으니, 세상일에 초연하여 구차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기록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리고 청(淸)·풍(風)·명(明)·월(月)로 분운(分韻)해 명 자를 얻으셨다. 시를 지으시기를 ‘달빛 어린 물 위는 희부옇고 밤기운 맑은데/바람이 쪽배 불어 달빛 환한 강물 거슬러 오른다/표주박에 담긴 백주는 은잔을 기울여 마시고/달빛 어린 물결에 노 저어 별빛을 끌고 가노라/채석강에서 광태 부렸던 건 잘한 일 아니요/낙성호에서 뱃놀이한 일이 가장 생각나누나/알지 못하겠다, 백년 뒤 통천에서/주자의 시 이은 사람 또 누가 있는지’ 했으니, 산수(山水)에서 흥취를 깊이 얻은 것이 이와 같았다.”
퇴계가 60세 때 도산서원 아래 낙동강에서 즐긴 뱃놀이 광경을 기록한 것이다. 퇴계의 시에서 ‘공명(空明)’과 ‘유광(流光)’은 소동파의 ‘전적벽부’에 ‘계수나무 노와 목란 상앗대로 맑은 물결을 치며 달빛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오르도다’한 데서 온 말로 밝은 달빛이 비친 강물을 형용한 것이다. 그런데 동파는 주자가 가장 배격한 인물이다.
‘소씨(蘇氏)는 그 몸가짐이 이미 형공(荊公)처럼 엄정하지 못하고 그 학술은 결국 공리(功利)를 잊지 못하고 속임수가 많다.’
동파의 몸가짐과 학문이 바르지 못하다고 비판하면서, 동파가 집권했다면 왕안석보다 훨씬 큰 폐해를 끼쳤을 것이라고 했다. 퇴계는 주자를 가장 흠모했고 평생을 두고 주자학을 연구한 학자다. 따라서 소동파를 비판한 주자의 저술을 누구보다 많이 읽었을 텐데도 ‘욕심이 없었고 세상일에 초연하여 구차히 살지 않았다’고 소동파를 평하고, 소동파가 귀양 갈 때 관을 싣고 갔다는 사실을 한 증거로 들었다. 그런데 주자는 소동파가 귀양 갈 때 모습을 형편없이 나약한 소인으로 기록했다.
‘동파가 호주(湖州)에서 체포될 때 얼굴은 사색이 되고 두 다리에 맥이 풀려 거의 걷지도 못하였으며, 집에 들어가 가족과 작별하게 해달라고 했으나 사자(使者)가 들어주지 않았다.’
유학사(儒學史)에서 주자는 맹자와 정이천을 닮았고 퇴계는 안연과 정명도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주자는 맹자처럼 토론에서 결코 지지 않았고 그 어조도 결연해 양시양비(兩是兩非)는 있을 수 없다고 했다. 반면 퇴계는 토론하다가 끝까지 서로 견해가 맞지 않아도 “그대는 그대대로 연구하고 나는 나대로 연구해 또 십여 년 공부를 쌓아야 할 것이니, 그런 다음 저마다 자신의 견해로 이 문제가 어떤지 보면 피차의 옳고 그름을 알 수 있을 것이다”하며 26세나 연하인 기고봉(奇高峯)을 포용했다. 이름난 학자가 되려면 명석한 두뇌, 비판적 사고가 필요하겠지만 좋은 학자가 되려면 무엇보다 먼저 사람을 사랑하는 푸근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또 이것이 큰 학문의 바탕이 되고 메마른 인문학을 촉촉히 적셔주는 수분이 된다고 생각한다.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itkc.or.kr)의 ‘고전포럼-고전의 향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상하 < 고전번역교육원 교수 >
퇴계는 주자를 가장 충실히 배운 학자이지만 소동파에 대한 견해만큼은 다르다. 퇴계와 주자의 성향 차이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이덕홍(李德弘·541~1596)의 《계산기선록(溪山記善錄)》에 이런 글이 실려 있다.
‘신유년(1561) 4월15일에 선생이 조카 교, 손자 안도 및 덕홍과 더불어 달밤에 탁영담에 배를 띄워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서 반타석에 배를 정박했다가 역탄에 이르러 닻줄을 풀고 배에서 내렸다. 세 순배 술을 마신 다음 선생이 옷깃을 바루고 단정히 앉아 마음을 고요히 가다듬고 한참 동안 가만히 계시더니 ‘전적벽부(前赤壁賦)’를 읊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소공(蘇公)이 비록 병통은 없진 않지만 그 마음에 욕심이 없었음은 ‘진실로 나의 소유가 아니면 비록 털끝만 한 것도 취하지 않는다’ 이하의 구절에서 알 수 있다. 또 귀양 갈 때 관(棺)을 싣고 갔으니, 세상일에 초연하여 구차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기록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리고 청(淸)·풍(風)·명(明)·월(月)로 분운(分韻)해 명 자를 얻으셨다. 시를 지으시기를 ‘달빛 어린 물 위는 희부옇고 밤기운 맑은데/바람이 쪽배 불어 달빛 환한 강물 거슬러 오른다/표주박에 담긴 백주는 은잔을 기울여 마시고/달빛 어린 물결에 노 저어 별빛을 끌고 가노라/채석강에서 광태 부렸던 건 잘한 일 아니요/낙성호에서 뱃놀이한 일이 가장 생각나누나/알지 못하겠다, 백년 뒤 통천에서/주자의 시 이은 사람 또 누가 있는지’ 했으니, 산수(山水)에서 흥취를 깊이 얻은 것이 이와 같았다.”
퇴계가 60세 때 도산서원 아래 낙동강에서 즐긴 뱃놀이 광경을 기록한 것이다. 퇴계의 시에서 ‘공명(空明)’과 ‘유광(流光)’은 소동파의 ‘전적벽부’에 ‘계수나무 노와 목란 상앗대로 맑은 물결을 치며 달빛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오르도다’한 데서 온 말로 밝은 달빛이 비친 강물을 형용한 것이다. 그런데 동파는 주자가 가장 배격한 인물이다.
‘소씨(蘇氏)는 그 몸가짐이 이미 형공(荊公)처럼 엄정하지 못하고 그 학술은 결국 공리(功利)를 잊지 못하고 속임수가 많다.’
동파의 몸가짐과 학문이 바르지 못하다고 비판하면서, 동파가 집권했다면 왕안석보다 훨씬 큰 폐해를 끼쳤을 것이라고 했다. 퇴계는 주자를 가장 흠모했고 평생을 두고 주자학을 연구한 학자다. 따라서 소동파를 비판한 주자의 저술을 누구보다 많이 읽었을 텐데도 ‘욕심이 없었고 세상일에 초연하여 구차히 살지 않았다’고 소동파를 평하고, 소동파가 귀양 갈 때 관을 싣고 갔다는 사실을 한 증거로 들었다. 그런데 주자는 소동파가 귀양 갈 때 모습을 형편없이 나약한 소인으로 기록했다.
‘동파가 호주(湖州)에서 체포될 때 얼굴은 사색이 되고 두 다리에 맥이 풀려 거의 걷지도 못하였으며, 집에 들어가 가족과 작별하게 해달라고 했으나 사자(使者)가 들어주지 않았다.’
유학사(儒學史)에서 주자는 맹자와 정이천을 닮았고 퇴계는 안연과 정명도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주자는 맹자처럼 토론에서 결코 지지 않았고 그 어조도 결연해 양시양비(兩是兩非)는 있을 수 없다고 했다. 반면 퇴계는 토론하다가 끝까지 서로 견해가 맞지 않아도 “그대는 그대대로 연구하고 나는 나대로 연구해 또 십여 년 공부를 쌓아야 할 것이니, 그런 다음 저마다 자신의 견해로 이 문제가 어떤지 보면 피차의 옳고 그름을 알 수 있을 것이다”하며 26세나 연하인 기고봉(奇高峯)을 포용했다. 이름난 학자가 되려면 명석한 두뇌, 비판적 사고가 필요하겠지만 좋은 학자가 되려면 무엇보다 먼저 사람을 사랑하는 푸근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또 이것이 큰 학문의 바탕이 되고 메마른 인문학을 촉촉히 적셔주는 수분이 된다고 생각한다.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itkc.or.kr)의 ‘고전포럼-고전의 향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상하 < 고전번역교육원 교수 >